고려시대 인쇄

1. 고려 초기의 인쇄술

(1) 신라 인쇄술의 계승

신라시대 때 발상(發祥)하여 말기까지 보급되어 왔던 인쇄술은 고려조로 계승되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신라 인쇄술의 발상과 보급에 큰 영향을 끼쳤던 불교가 고려조로 넘어와 국가의 종교로 승격하고 부흥정책이 더욱 강구되어 사찰이 전국 각지에 생겨났고 종파도 점차 확장되었다. 따라서 국민 전체의 신앙도가 날로 높아져 갔으니 불경의 간행이 활기를 띄기 시작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 초기 인쇄술의 연원은 전북 익산군 왕궁리의 5층 석탑에서 발견된 양각(陽刻) 금판본(金板本)인《불설금강반야바라밀경(佛說金剛般若波羅密經)》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금판경은 1966년 12월 5일 석탑 해체 공사 중 금동외함 내에서 2조로 묶은 순금 경판 19장으로 발견되었는데, 가로 14.8㎝, 세로 13.7㎝이며 각 판은 17행, 매 행마다 17자씩 판면에 두드러지게 양각되어 있다.

양각된 글자는 조각한 목판 위에 금판을 덮어서 찍은 압판자(押板字)인지, 인본을 한 장씩 금판에 붙여 글자 한 자씩 압각(押刻)한 것인지, 혹은 글자 한 자씩 목각자를 만들어 금판으로써 글자를 압각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려우나 신라 말에 조각된 음각 금동판보다는 진보된 기술 수준을 보이고 있다. 양각된 글자는 글자 획의 부분이 판면 위로 노출되어 있으므로 음각보다는 인쇄하기가 편리할 뿐만 아니라 다른 판본들과 같이 서책으로 펴내기도 용이하다.

《불설금강반야바라밀경》의 글자체는 진체(晉體)로 된 사경체(寫經體)인데, 글자체와 필법이 중국의《금강반야바라밀경》과 비슷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인본에 의한 압각판이 아닌 가도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본 금판경은 어느 때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함께 발견된 유물들이 고려 초기의 것들이 많아 본 금판경 또한 같은 시기의 각판(刻板)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고려 초기 인쇄술의 발달 과정을 연구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보협인다라니경

신라시대의 인쇄술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고려 초기의 인쇄술은 관서(官署)에서보다는 각 사찰에 의해 이루어졌다. 특히 인쇄술의 발상과 보급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불교가 고려에 들어와 국가적 종교로 승격되어 신도가 날로 늘어나자, 불경 간행이 크게 활기를 띄면서 인쇄술을 더욱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시대는 국초부터 거란과 여진, 몽고 등 잇따른 외침과 국내 정변에 의한 여러 차례의 전화(戰禍)를 겪으면서 그간에 간행된 귀중한 전적(典籍)을 비롯한 숱한 문화 유산들이 소실되거나 탕진되고 말았다. 따라서 불탑이나 불복(佛復)에 봉안했던 전적 중 약간이 오늘날까지 겨우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목판 인쇄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총지사(摠持寺)에서 간행한《일절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 印陀羅尼經)》을 들 수 있다. 본 경에는 간기와 내제(內題)가 적혀 있는데, 이에 의하면 "고려 목종 10년(1007)에 총지사 주지인 진념광제대사(眞念廣濟大師) 홍철(弘哲)이 조조(雕造) 인시(印施)하여 사리와 함께 봉안 공양하였다"고 되어 있다.

다라니경을 서사하거나 간행하여 납탑 공양하는 의식은《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보듯 신라 때부터 널리 행하여져 왔는데,《보협인다라니경》도 이처럼 불탑에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본 경의 형태는 조그마한 목심축(木心軸)에 감겨진 두루말이로 원래 사리외함에 넣어 불탑에 봉안하기 위해 간행된 것이기 때문에 표지에 의한 보호와 장식도 하지 않은 소박한 장정으로 되어 있다.

종이는 황색으로 고색이 자못 창연하며, 1천여 년이 지났음에도 보존이 잘 되어 거의 완전 무결한 상태를 띄고 있다. 종이가 오래 되면 으레 누렇게 퇴색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본래 황벽(黃檗)으로 물들인 종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권지(卷紙)의 폭은 7.8㎝, 전체 길이는 240㎝, 상하 단변의 판광(板匡)은 5.4㎝로 위아래에 각각 1.2㎝의 여백을 두고 있으며, 글자의 지름은 0.5∼0.7㎝, 각 행의 글자 수는 9∼10자로서 지면의 전후와 상하의 여백이 보기 좋게 잘 짜여진 목판 인쇄본이다. 권두(卷頭)에는 간기가 5행에 걸쳐 새겨져 있고 그 다음에는 10㎝ 정도의 양각으로 된 불화(佛畵)가 끼여 있으며, 불화에 이어서 내제의 다라니경과 함께 경문이 계속되어 있다.

특히, 불화는 본 경 내용의 골자를 압축해 묘사하고 있어 시각적인 면에서 그 윤곽을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음은 물론, 우리 나라의 삽화나 판화 미술에서도 현재 전해오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한층 더해 주고 있다.

《보협인다라니경》을 간행하여 납탑 공양하는 불사는 원래 중국 오월(吳越)에서 성행하였는데, 고려가 당시 그 나라와 교류를 활발하게 했음을 고려하면 본 경의 간행도 오월의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영향은 오월판을 그대로 번각 수용한 것이 아니라 불사 방법만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는 본 경을 중국의 오월판(吳越版)과 비교해 보면 적지 않은 차이점이 드러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오월판은 목판 인쇄한 소형의 권자본으로 판식이 상하의 단변 사이에 간기부터 시작하여 변상도(變相圖) 및 경문의 순서로 판각되어 있어 개괄적인 판식과 형태는 총지사본과 비슷하다. 그러나, 판식의 세부적 내용인 상하 판광의 높이, 전체 길이, 화폭 등을 비롯한 글자체나 변상도 및 경문의 내용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점으로 보아 고려는 중국으로부터 경문을 도입하고 개판(開板)에 의한 납탑 공양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오월판을 그대로 모각(模刻)한 것이 아니고 실제의 개판 과정에 있어서는 월등하게 창의성을 발휘한 독자적인 체제로 판각하여 인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경문의 새김이 정교하고 불화 내용의 묘사도 뛰어나며, 본문의 내용도 오탈자가 거의 없이 정확한 것은 이미 고려 초기부터 조판(雕板) 인쇄술에 독창성이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경(印經)의 형태가《무구정광대다라니경》처럼 권축(卷軸)으로 되어 있으나, 글자의 새김이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며 글자 획의 크고 작음이 균형을 잘 이루면서 필력의 약동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조판술이 신라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기술 발전에 계속 노력해 왔음이 드러나고 있다.

흐른 오늘날까지도 글자 획과 화면(畵面)이 선명하여 고려 초기의 훌륭했던 각판술의 면모를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판하본을 정서 하여 정성껏 조각한 고려 초기의 정각본(精刻本)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서예와 판화는 물론 인쇄술의 우수성에 대해서도 감탄하게 한다.

이러한 점들은 본 경이 지니는 인쇄 문화적 가치를 객관적으로 입증해 주는 증거인데, 이처럼 훌륭한 인쇄기술이 있었기에 고려 문화의 정수(精髓)인 대장경의 거대한 조조 사업을 가능하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현종2~22년(1011~1031)에 간행된(우가사지론)초조대장경의 하나이다.

(3) 판본의 수입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에 이르는 시기는 중국에 있어 5대(五代) 및 북송(北宋) 초기에 해당되는데, 이 시대에 들어서 중국의 인쇄술은 더욱 융성하여 관각(官刻)과 사각(私刻)이 두루 성행하였다.

인서(印書)는 석경문(石經文)에 의한 9경 및 3전을 비롯하여 5경 및 사서, 문집 등의 유서(儒書)들이 많이 인출되었으며, 불경의 각본도 계속 발전하였다. 이 시대의 각본으로 유명한 것은 돈황 석실에서 발견된《금강반야바라밀경》과 오월왕(吳越王)이 새긴 《보협인다라니경》등이 있다.

이러한 판본들이 고려 초기에 수입되어 고려 인쇄술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고, 고려에 전해진 진서(珍書)들은 다시 송에 보내져 대륙과의 사이에 인본의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즉, 고려 태조 11년(928)에 신라 승려 홍경(洪慶)이 후당(後唐)에서 대장경 1부를 가져와 제석원(帝釋院)에 안치하였으며, 광종 12년(961)에는 오월왕의 요청에 의해 천태(天台)의 논소제문(論疏諸文)을 전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 교류된 서책들 중에는 인본 뿐만 아니라 초본(抄本)도 섞여 있었다.

중국의 인쇄술은 더욱 발전하여 송(宋) 태종 8년(983)에 이르러서는 13년 동안의 조조 기간을 거친《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板大藏經)》을 완성하였다. 총 481함(函)에 2,500권이나 되는 이 장경을 성종 10년(991)에는 한언공(韓彦恭)이 송으로부터 가져 왔다. 본 칙판장경은 뒷날 현종 및 문종이 장경을 조조할 때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고려에서 초조 대장경이 완성될 때까지 두 차례나 더 수입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절이나 상인들을 통해서도 새로 나온 송판(宋板) 장경의 인본들도 계속해서 수입되었다.

한편, 고려는 성종·현종 때부터 거란의 침략을 받았으나 평화적인 사절들의 왕래도 있어서 문물의 교환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문종 17년(1063)에는 거란이 1천여 권에 달하는 대장경을 보내 왔다.

거란본의 장경은 대부분 망실되어 현재는 전혀 전해오고 있지 않지만,《동문선(東文選)》에 "거란본은 부질(部帙)이 간경하여서 200함이 되지 못하며 지박(紙薄) 자밀(字密)한 책이 1천권이 되지 않으나, 그 정교한 것은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신교(神巧)를 빌어 이루어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분량은 많지 않았으나 판각이 극히 정교하여 이 책들은 그 후의 대장경 제작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처럼 중국으로부터 들여 온 서적들은 고려의 인쇄술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송과 거란으로부터 수입된 대장경은 초조 대장경 조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대장경의 조조(雕造)

(1) 초조 대장경

총지사에서 간행된《보협인다라니경》에서 보듯 고려 초기의 판각술은 사뭇 정교하고 인쇄술 또한 해를 거듭할수록 발전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성종 때 북송이 동양 최초로 개판한 거질(巨帙)의《개보칙판대장경(開寶勅板大藏經)》이 수입되었다. 이는 당시 불교문화가 융성하고 문화대국으로서의 위력을 떨치고자 하는 고려에 자극을 주게 되었다.

그러던 중 거란군이 침입하여 국토를 유린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지르니, 이를 대장경 조조에 의한 불력(佛力)으로 타개해 나가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국사나 민사가 다난(多難)할 때면 불력의 영험에 의하여 그 바램을 이루고자 함이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는 널리 퍼져 있었다.

이와 같이 국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대발원과 대장경을 만들어 문화 대국으로서의 위력을 떨침으로서 이민족들이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착수한 것이 바로 초조 대장경의 조조(雕造) 사업이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초조 대장경 판본에는 간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 탓에 대장경 조조가 언제부터 시작되어 어느 정도의 수량이 개판(開板) 되었는지의 시기나 회수, 규모 등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학설이 제기되어 왔으나, 개판 시기는 조조의 동기가 현종 2년에 내침한 거란군을 퇴치코자 하는데 있었던 것이라면 늦어도 현종 3년(1012) 경부터 시작되었으리라고 보여진다.

대장경의 조조에 관한 기록 중 그 시기가 가장 앞선 것은 고려 고종 24년(1237) 팔만대장경을 재조할 때 이규보(李奎報)가 쓴《대장각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에 나타나고 있는 현종 2년(1011)경 설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현종 2년에 거란병이 대거 내침 하여 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고 거란병은 송악성(松岳城)에 남아 있어 물러가지 않으므로, 이에 군신(君臣)과 함께 무상대원(無上大願)을 발하여 대장경 판의 각성(刻成)을 맹세하였더니 그 뒤에 거란병이 스스로 물러갔다고 적혀 있어, 조조의 시기와 동기에 대해 밝혀 주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대장경 조조사업은 현종 20년경에 이르러 5천 축(軸)의 장경을 완성하였으며, 문종 17년 이후에 거란장경이 새로 수입되자 또다시 조조 작업을 속개하여 총 6천여 권에 달하는 장경을 조조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초조 대장경은 현종 2년(1011)의 거란 내침을 계기로 송(宋)의《개보칙판대장경》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시작해 5천 축에 가까운 장경을 1차로 완성하였고, 덕종과 정종이 재임한 15년간은 그 사업을 지속시키지 못하고 보관에만 힘쓰다가, 문종 5년경 거란으로부터 들여온 대장경을 저본으로 조조를 다시 시작하여 선종 4년(1087)에 이르러 2차를 완성함으로서 76년에 걸친 대역사가 일단락 되었던 것이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고


본 장경판은 개성 부근의 대흥왕사(大興王寺)에서 완성되어 대구 부근의 부인사(符仁寺)로 이관 수장되었으나 애석하게도 고종 9년(1232)에 내침한 몽고병의 병화(兵火)로 모두 타버리고 말았다. 그 소실(燒失)은 대장경이 완성되어 150년 정도가 지난 뒤의 일이므로 그 동안에 인출된 간본이 결코 적지 않았을 것임에도 이 또한 그 후 계속됐던 외침과 내란에 의해 거의 없어지고 말았다.

초조 대장경의 인본은 그 동안 국내에는 남아 있지 않고 일본의 남선사(南禪寺)에 비장된 6종의 3백여 첩(帖)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근래 들어 국내에서도 여러 종을 발굴해 냈으며, 그 중 일부는 국보로 지정하기도 했다. 거질의 장경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초조 대장경은 개보판(開寶板)과 거란판 등을 두루 수용한 동양 초유의 방대한 한역(漢譯) 장경이며, 외국 장경의 체재는 따르면서도 그대로 번각하지 않고 다시 써서 정성껏 새긴 것은 조판(雕板) 인쇄술의 우수성을 돋보이게 한 바, 참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의천의 속장경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11세 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천성이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던 그는 열렬한 구법도(求法徒)로서 고금장경론을 수집하기 위해 송에 가려 했으나 부왕(父王)의 승낙을 얻지 못하다가, 선종 2년(1085)에야 송에 들어가 각지를 돌아다니면서《화엄대불사의론》을 비롯한 3천여 권의 장소(章疏)를 수집하여 이듬해 귀국하였다.

의천은 귀국 후 형인 선종의 추천으로 흥왕사(興王寺)의 주지가 되자 여기에 교장사(敎藏司)를 두고 수집해 온 장경소초(藏經疏 )의 조조사업에 착수하면서 국내는 물론 요, 송 및 일본에까지 손을 뻗쳐 총 1,010부, 4,857권의 교소(敎疏)를 수집하였다.

선종 7년(1090)에 교소목록을 편성하여《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펴냈는데, 목록의 이름을 교장(敎藏)이라 한 것은 정장(正藏)을 보속(補續)하기 위한 교소류를 집성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에 따라 의천이 조조한 교장을 총칭하여 속장경(續藏經)이라고 한다.

총록은《의천목록》또는《속장목록》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상·중·하 3권으로 나뉘어 제1권은 경부(經部), 제2권은 경(經)·율부(律部), 제3권은 논(論)·집부(集部)로 되어 있다. 수록된 소초의 대부분은 당·송의 것이나 신라인의 찬술도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의천의 간행사업 시기는《고려사(高麗史)》에 밝혀져 있지 않아 현존하는 속장경본이나 그 장경들의 중간본(重刊本)의 말미에 적혀 있는 간기 등을 종합 검토하여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이들 간기에 의하면 의천의 속장경 간행사업은 선종 7년에 불서의 목록인《신편제종교장총록》을 편성하고 다음해 흥왕사에 교장사를 두어 교장들을 간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짐작되며, 숙종 6년(1101)에 이르기까지 약 11년 동안에 걸쳐 간행사업이 계속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 팔만대장경판 가운데 첫 번째 경판인 (대반야바라밀다경)판. 고려 고종 24년(1237)에 만들어졌다. 해인사 소장


속장경의 수량에 대해서는《고려사》의 <대각국사전(大覺國師傳)>에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기로 하고 요와 송의 서책을 구하여 거의 4천 권에 달하였는데, 이를 모두 간행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흥왕사 교장사에서 간행한 속장경의 총수는 약 4천 권에 달하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의 원본들은 거의 소멸되고 현재 일본 동대사(東大寺) 도서관에 40권이 남아 있어 겨우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중간본(重刊本)은 순천 송광사에도 여러 종이 남아 있다.

인본(印本)은 남색으로 된 표지에 닥나무 종이를 사용하였으며, 글자체는 송판(宋板)보다 훨씬 단정하고 판각술이 뛰어나 인쇄상태가 훨씬 우아하며, 절첩(折帖)인 송판과는 달리 두루말이 식으로 되어 있다. 이는 본 속장경이 송판본을 그대로 모각한 것이 아니고 독창성을 발휘하여 경판을 조조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한, 한역(漢譯) 장경에 대한 제가장소(諸家章疏)를 처음으로 집대성하여 정장(正藏)과 쌍벽을 이루게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민족들은 감히 생각조차 못했던 큰 업적임에 틀림없다.

특히, 인쇄기술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속장경이 지니는 특징과 우수성은 초조 및 재조 대장경보다 훨씬 뛰어난다. 즉, 초조 및 재조 대장경은 매 행마다 14자씩인데 비해 속장경은 20∼22자씩으로 되어 있어 글자가 훨씬 작고 매우 정교한 점이 한 눈에 느껴진다.

글자체는 모두 구체(歐體)인 점은 공통되나 속장경은 초조 및 재조 대장경과는 달리 기간본을 바탕으로 하거나 참작하여 새긴 것이 아니고 당대의 명필가를 동원하여 새로 정서하고 철저한 교정을 거쳐 정교하게 판각한 것이다. 따라서 속장경의 우수성은 초조 및 재조 대장경보다 훨씬 월등한 바, 고려 조판(雕板) 인쇄술의 정수라 일컬을 만 하다.

(3) 재조(再雕) 대장경

1) 조조(雕造) 배경과 각인(刻印) 상황

우리 역사상 고려조만큼 끊임없는 외침에 시달린 왕조는 없었는데, 초기의 거란과 여진족의 외침에 이어 고종 18년(1231)에는 몽고군이 대거 침입하여 수도인 개성에 육박해 오자 조정은 하는 수 없이 수도를 임시로 강화로 옮기고 외침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부인사에 소장되었던 초조 대장경이 동왕(同王) 19년(1232) 몽고군의 병화에 의해 완전히 소실되자 크나 큰 충격을 받고, 현종 때의 선례에 따라 불력으로써 몽고군을 퇴치코자 대장경 판의 재조를 거국적으로 발원하게 되었다. 전쟁 중의 곤궁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갖은 노력으로 재조를 결행하여 마침내 완성한 것이 재조 대장경, 즉 현재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이다.

재조 대장경의 제작 연대에 관하여는 고종 때의 문신인 이규보가 지은《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임금이 문무백관과 함께 대 발원하여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경판을 새기기 시작했다"라는 기록과《고려사》에 "왕이 백관을 인솔하여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에 행향(行香)하고 동왕 19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소실된 경판을 군신과 더불어 다시 발원하여 도감을 세우고 16년을 걸쳐 필역(畢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상고해 보면, 경판 주조사업을 전담하기 위하여 고종 23년(1236)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16년 동안의 조조 기간을 거쳐 동왕 38년(1251)에 완성 시켰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대장경의 인본에서 간기를 조사해 보아도 입증되고 있다.

도감은 강화도의 본사(本司) 이외에 경남 남해에 분사를 따로 두어 사업을 분담하게 하였다. 분사를 남해에 설치한 것은 재난을 방지코자 하는 의도와 함께 장경판용의 목재인 후박나무가 풍부하고 그 재목들을 수송하기에 편리한 섬 지역을 선택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조(雕造)용 판재는 제주도, 거제도, 완도 등 섬 지역에서 자라 거친 바닷바람과 소금기에도 잘 견디는 자작나무와 후박나무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나무를 베어 적당한 크기와 부피의 판목으로 켜서 소금물에 담가 수지를 빼는 일을 되풀이한 다음 그늘에서 오랫동안 건조시켜 뒤틀리거나 비틀리지 않게 함으로서, 글자를 새기기 쉽게 함과 아울러 부식과 충해도 방지할 수 있도록 했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약 26㎝, 가로 약 72㎝, 두께 2.8∼3.7㎝로 경판 하나의 무게는 일정치 않으나 대개 2.7∼3.8kg이다. 전면에 칠을 얇게 발랐으며, 양쪽 끝에는 뒤틀리지 않도록 편목(片木)을 붙였고 네 귀에는 동으로 만든 금구(金具)로 장식했다.

판면은 세로 약 24.5㎝, 가로 약 52㎝이며 1면에는 23행, 매 행마다 14자씩의 글자가 새겨져 있고 글씨체도 대체로 구양순체인 점에서 초조 대장경과 비슷하다. 따라서 경판 1매에는 736자 가량이 새겨져 있고 전체 경판에 새겨진 총 글자 수는 무려 5,980여만 자나 된다. 상·하에는 계선을 두고 있으나 중앙에는 판심이나 괘선이 없으며, 글자의 새김은 앞뒤 양면에 되어 있다. 또한, 판면 한 쪽에는 작은 글씨로 경명(經名), 권차(卷次), 장수 및 천자문으로 된 번호의 함수(函數)가 표시되었다.

본 대장경은 구목록의 639함에 편입된 장경의 총 부수는 1,547부 6,547권이고, 추가 목록의 24함에 들어 있는 15부 231권을 합치면 총 663함 1,562부 6,778권이다. 본 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르는 것은 판본이 81,445장이라는 데서 기인된 것이며, 양면에 판각된 경(經)·율(律)·논(論)·장소(章疏)를 합한 6,778권을 인쇄하는데 소요되는 종이는 실로 162,890장에 달한다.

경판은 완성된 후 고려말까지 강화 도성 서문 밖의 대장경판당을 거쳐 선원사(禪源寺)에 수장(收藏)되었다가, 조선 태조 7년(1398) 서울 서대문 밖의 지천사(支天寺)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진 다음 오늘날까지 보관되어 오고 있다.

2) 의의와 가치

우리 나라 문화재 가운데 세계에 널리 자랑할 만한 것으로는 단연 재조 대장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만큼 본 대장경은 민족문화 유산 가운데서도 단연 으뜸이 되는 문화재인 것이다.

흔히 문화 민족이나 문화 국가를 거론할 때, 인류 문화사에 길이 남을 문화 유산을 만들었느냐 하는 점과 이러한 문화재를 잘 보존하고 있는 민족이나 국가인가를 거론하게 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은 분명 인류 문화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할 만한 훌륭한 문화재를 적지 않게 남겼지만, 이러한 문화재를 보존하고 전승해 온 점에 있어서는 외세에 의한 불가항력적인 요인을 감안하더라도 자성할 점이 많이 있다.

그러나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해 우리 민족이 남겨 놓은 문화재로서 양적으로나 질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 보존 상태에 이르기까지 가히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재조 대장경이라 할 수 있다.

재조 대장경은 대체로 초조 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판식이나 1행의 글자 수, 글자체 등이 대체로 초조본과 동일하지만, 판각술의 정교도는 초조본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초조 대장경을 그대로 번각한 것이 아니라 초조 대장경본을 비롯하여 송본과 거란본 등을 참고 대조하여 각본들의 오탈자와 착오를 철저하게 보정함은 물론 당의《개원록(開元錄)》과《정원록(貞元錄)》까지 참고 자료로 이용하여 장·단점과 득실을 엄밀히 따져서 내용을 크게 보완하였다.

이처럼 경판 내용은 국내외의 관련 문헌을 두루 참고하여 엄중히 교정 또는 보수하였기 때문에 초조 판에 비해 훨씬 충실하며, 그 중에는 장문(長文)이 보완된 것도 있다. 이러한 교감작업이 있었기에 재조본은 내용상으로도 완벽을 기할 수 있어 국내외 학계에서 널리 인정하고 있듯이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조조된 어떠한 장경보다도 본문이 잘 보수되어 오탈자가 적기 때문에 현재 국내외에 사용되고 있는 대장경의 정본이 되고 있다.

비록 전란 중이지만 서두름이 없이 냉철하고 침착하게 글자 하나 하나까지 엄밀한 검토를 통해 바로 잡았다는 사실은 후세인들에게 커다란 교훈이 되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문헌 고증과 교감 작업이 이처럼 철저하게 이루어진 예는 거의 없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조선시대의 학자나 금속활자 인쇄술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재조 대장경이 이렇듯 오랜 기간에 걸쳐 국내외에서도 가장 우수한 대장경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요인은, 경판사업에 대한 강력한 국가적 뒷받침과 거국적인 항몽의지 및 민족자존 의식의 발로, 그리고 고려 민중의 돈독한 불교적 신앙심과 국난 극복의 의지력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점이 재조 대장경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요 가치이며, 그 방대한 경판이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되어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점 또한 높이 평가된다.

따라서, 본 대장경 판이야말로 세계적으로 널리 자랑할 수 있는 우리의 훌륭한 인쇄문화 유산이며, 1995년에는 본 경판이 수장된 경판고와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됨으로서 그 우수성을 세계적으로도 널리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3. 목판 인쇄술의 발달

(1) 관판

1) 관판의 개판

고려는 국가의 기본 이념과 내세관을 불교에 두어 국교로써 우대하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치세(治世)의 현실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였다. 그런 까닭에 이미 때조 때부터 개경은 물론 서경(평양)에까지 교육기관을 설치하고 고관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한편 학문에 필요한 서적들을 대대적으로 정비함으로써 권학(勸學)에 힘썼다.

특히 광종 9년(958)에는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관리를 뽑아 등용하기 시작함에 따라 과거시험에 필요한 시부(詩賻)나 경서(經書), 의서(醫書), 복서(卜書) 등이 대량으로 필요해졌고, 성종 또한 유학을 숭상하고 학문에 필요한 서적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또한 과거를 거쳐 많은 문사들이 잇따라 배출되었기 때문에 비록 문인들이 소외되었던 무신 집정기라 하더라도 저술이 끊이지 않았으며, 학문의 범위도 넓어지고 분야도 다양해졌다. 이같은 수요에 따라 중앙에서는 국가의 주요 사업으로 대장경 판을 주조하는 한편 지방 관아에서는 경서 등이 많이 개판 되어 인쇄 기술이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되었다.

관판이 이처럼 과거 교육과 권학에 필요한 경서 등을 판각하여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대장경 조조 사업이 상당히 진척되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한편, 지방 관아의 판각술도 일정 수준에 도달했고, 과거와 학문을 위한 향학열이 경향 각지에서 크게 높아져 각종 서적의 양산이 크게 요구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중앙 및 지방 관아에 의한 관판 인쇄는 초조 대장경의 조조가 한창 이뤄졌던 현종 대를 지나고 거란과의 전쟁도 멈췄던 무렵 즉, 11세기 전기 경부터 서서히 시작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관판 인쇄는 중앙에서는 비각(秘閣) 즉, 비서성(秘書省)에서 전담하다가 후에는 서적포(書籍鋪)에서 맡아 행하였다. 반면 지방 관아에서는 동경(경주), 서경(평양) 등을 비롯하여 전주, 나주, 충주, 진주, 상주목 등의 여러 목(牧)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비서성은 각종 서적들을 소장하는 왕립 도서관의 역할 뿐만 아니라 중앙 및 지방 관아에서 판각한 책판(冊板)을 수집 관리하며, 서적을 직접 인쇄하고 배포하는 관영 출판부의 일까지 맡아 했다. 각 지방의 관아에서 새로 판각하여 진상한 판본들이 해를 거듭하면서 비서성의 입고 물량이 늘어난 탓에 훼손이 심해지자, 숙종은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에 서적포를 새로 마련하고 이들 판본들을 이관시켜 보관하면서 서적을 널리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려의 관판은 과거시험과 면학을 위한 서적이 필요한 데서 발달하게 됨에 따라 저술이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해지고 학문의 영역 또한 넓어져 몇 종의 불서(佛書)를 제외하고는 사서(史書), 시문집, 의복서(醫卜書)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양질의 판본과 문헌이 고루 완비되어 있어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송나라에서는 사신에게 도서 목록을 써서 주면서 권질(卷帙)이 부족하더라도 모두 베껴 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2) 관판의 성격과 특징

고려 관판의 특징은 우선 과거제도가 실시됨에 따라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문치(文治)에 있어서 동량(棟梁)이 되고자 하는 큰 뜻을 품은 이들이 과거 시험과 면학을 위한 서적이 필요로 한 데서 생겨나 발달했다는 점이다. 이는 몇 종의 불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서적이 과거와 면학에 필요한 사서, 시문집, 경서 등이어서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대부분의 관판이 중앙이 아닌 지방 관아에서 개판된 판본 즉, 지방관판이라는 점이다. 고려의 관판은 정종 11년(1045)에 비서성이 두 종류의 유서(儒書)를 간행한 것을 제외하면 모두가 지방 관아에 의해 개판된 판본들이다. 이는 중앙 정부가 거질의 대장경 조조를 관장하고 그것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기 때문에, 대장경 이외의 관판본은 대부분 판각에 필요한 서적을 선정하거나 저본의 본문을 교감(敎勘)하는 일만 중앙에서 맡아보고 판각은 지방 관아에서 담당하여 진상케 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방 관아는 중앙의 명령이나 권장으로 관판을 판각하여 진상했으며, 중앙에서는 이를 관리하면서 인본을 간행하여 교육과 면학에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판 인쇄 정책은 지방 관아의 판각술을 크게 발달시켜 나중에는 스스로 필요한 서적까지 개판 하게 되었고, 나아가서는 지방의 문호들로 하여금 사가판(私家板)까지 출간하게 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관판은 대부분 중앙에서 만든 것이 아니고 지방 관서에 하명 또는 권장하여 판각한 것이기 때문에 대체로 판각술이 사찰판에 미치지 못하고, 현존하는 인본을 보면 중국에서 수입된 송원본(宋元本)을 그대로 복각한 것이 많아 판각법이 조잡한 편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우리 나라에서 저술된 서적을 판하본으로 마련하여 판각한 것도 있고, 글자체 또한 수입본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각한 것도 있어 독창성의 일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나, 고려의 관판 인쇄 정책은 후기에 이르러 지방 관아에만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공양왕 4년(1392)에 서적점(書籍店)을 원(院)으로 승격시키고 금속활자 인쇄를 관장하는 기구와 제도를 만들어 그 기능을 크게 강화시켰다. 이는 중앙 관아가 지방 관아로 하여금 목판을 판각해 진상케 하는 종래의 수동적인 인쇄 정책을 지양하고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금속활자로 활판본을 직접 펴내려는 능동적인 인쇄 정책을 구현한 것으로서, 관판 인쇄 정책에 있어 일대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사판

사판(私板) 인쇄는 중앙이나 지방의 관서(官署)에서 주관한 관판 인쇄와는 달리 사찰이나 개인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사찰판과 사가판(私家板)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중 사찰판은 각 사찰에서 공양이나 포교를 위해 간행했거나 공덕이나 명복을 빌기 위한 신도들이 시주하여 간행된 경전, 고승의 저술, 불교의식 등에 관한 책들로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계속 되면서 관판의 발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에 사가판은 고려 말기 경부터 출현하여 점차 발달하였다.

1) 사찰판의 개판과 특징

사찰판은 우리 나라의 판각 인쇄술을 발상 시켰음은 물론 보급,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는 신라 때 간행된《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입증되고 있으며, 고려의 인쇄술도 초기에는 주로 사찰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고려 초기의 일개 사찰에 불과한 총지사에서 간행된《보협인다라니경》은 그 당시 사찰의 인쇄술이 얼마나 발달되었는가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고려 초에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발달되었던 사찰의 인쇄술은 국가의 숭불정책으로 불교가 융성 됨에 따라 풍요해지는 사원 경제에 힘입고 국태민안(國泰民安)과 소원 성취를 발원하는 왕실과 권력층의 지원으로 더욱 활기를 띄고 발전하게 되었으며, 권문세가의 명복을 기원하는 불사가 성행해짐에 따라 사찰판의 판각과 간행사업이 고려말까지 꾸준히 촉진되었다.

사찰의 인쇄술은 국가에서 거질의 대장경을 개판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으며, 나아가 관판 인쇄를 싹트게 하였다. 또한, 국가 차원에서 조조하던 대장경 판과는 별도로 각 사찰에서는 자가용으로서 다양한 경판을 중간(重刊)하여 널리 사용하기도 했다.

사찰판은 글자체나 장정에 있어서도 그 기술이 꾸준히 발전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의 사찰판은 주로 신라에서 계승한 필서나 행서의 사경체(寫經體)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점차 재조 대장경의 글자체처럼 글자 획의 세로와 가로가 비슷한 정방형의 사경체로 변천되었으며, 나아가 대각국사 문집에서처럼 독특한 서체로까지 발전하였다. 또한, 장정에 있어서도 고려 중기경 까지는 거의 권자본(卷子本)으로 되어 있으나 그 이후는 절첩본(折帖本)이 등장하여 혼용되었고, 말기에 이르러서는 선장본(線裝本)이 주로 나타나고 있어 제책 기술의 발달된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사찰판이 관판보다 앞서 발전하게 된 것은 당시의 승려 중에는 판각이나 제본, 제지 기술을 가진 공인(工人)들이 많아 인쇄과정을 능히 자력(自力)으로 처리할 수 있었고, 사찰은 대체로 산림이 우거진 환경 속에 위치해 있어 판각용 목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등 목판 인쇄술 발달에 필요한 여러 조건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의 사찰판은 현재 비교적 여러 종이 전해오고 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완간판은 희귀하고 잔결판(殘缺板)이 대부분이어서 구체적인 판각 사항을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현재 문헌상에 나타나고 있거나 판이 전해오고 있는 사찰판으로는 현화사, 금산사, 부석사, 해인사, 부인사, 개태사, 흥덕사, 석왕사 등에서 판각했거나 간행한 것들이 다수가 있으며, 그 간행 시기도 고려시대 전 기간을 통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중 해인사에서는 고려 중기 때부터 국가적으로 추진 해 오던 대장경 판의 조조 사업과는 별도로 많은 대장경 판을 판각하여 지금껏 보존 해 오고 있는데, 이들 판을 대장경 판과 구분하여 잡판(雜板)이라고 부른다. 잡판은 당사(當寺)에서 개판된 것은 물론 다른 사찰이나 개인 시주 자들이 간행한 경판까지를 총칭하며, 현재 대장경판고 동서제에 보존되어 있다.

현존하는 사찰판본 중에는 잔결본이 많은 까닭에 간기를 잃어 개판 사항을 알 수 없는 것이 적지 않고 어떤 것은 간지(干支)로 표시되어 있어 어느 왕조의 시기에 해당하는지 알 수 없는 것도 있으며, 개판을 한 장소의 표시가 없는 것도 많이 있다.

이렇듯 사찰본 중에는 개판 사항을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적지 않으나 판각의 정조도(精粗度)로 미루어 간행 시기를 대충 가늠해 볼 수 있는데, 판각은 대체로 13세기까지는 정교하지만 14세기의 것이 되면 그 솜씨가 약간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사찰판은 주로 재질이 좋은 후박나무에 정각(精刻)되어 있어 판각술의 우수성을 입증해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에는 오늘날 문헌으로 전해오지 않거나 희귀한 것들도 들어 있어 좋은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2) 사가판의 개판

사가판은 고려 중기까지는 별로 보이지 않으나 말기 경에 들어서 차차 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사찰판의 발달에서 영향을 받고 중앙의 명령이나 권장으로 관판을 판각하여 진상하던 지방 관아의 판각술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권문세가나 지방 문호들에 의해 스스로의 문집 등을 발간한 사가판(私家板)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많은 문인들의 시문집이 사가판으로 간행됐다는 것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판본으로 남아 있는 것은 극히 적으며, 있다 하더라도 사가판으로서 간기가 명백한 인본은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문집 중에는 이규보의《이상국집》등과 같이 몇몇 종은 왕의 칙명에 의해 관서에서 개판된 것이지만 이를 제외한 대다수의 문집들은 사가판본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특히 관서에서 주도적으로 판각했던 송·원나라계의 판본이 아닌 고려의 독자적인 많은 판본들은 대부분 사가판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가판과 관련되어 현재 남아있는 여러 기록 중에서 간기가 명백한 인본으로는 이제현의《익재난고(益齋亂藁)》, 이인로의《파한집(破閑集)》과《은대집(銀臺集)》, 이승휴의《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 임춘의《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권부의《효행록(孝行錄)》등 다수가 있다.

이들 사가판들은 대부분 당시의 문인들이 자신들의 시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판각했거나 후손들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해 판각한 것들이지만, 이는 고려의 목판 인쇄술이 민간인들에게까지 널리 전파되어 활용되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4. 금속활자 인쇄술

(1) 금속활자 발명과 배경

고려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하게 된 배경과 시기에 대해서는 이를 정확하게 고증해 줄만한 자료가 없어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려우며, 다만 지금까지 전해 오는 관련 문헌과 주변 여건을 고려하여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고려 금속활자의 발명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한데, 종래에는 대체로 숙종 7년(1102)설을 주장하여 왔으나 근래 들어 주자(鑄字)를 관장했던 중앙 관서인 서적점(書籍店)이 문종 재위 기간(1047∼1083)에 설치되었음을 들어 문종 때로 앞당겨 보는 학설들도 나타나고 있다.

금속활자 인쇄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인쇄술 전반에 걸친 선행 조건인 종이의 대량 생산과 알맞은 먹의 생산, 그리고 금속활자 주조 기술이 터득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조건들이 문종 때에 이미 성숙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고려에서는 성종 때부터 각 지방에 지전(紙田)이나 지소(紙所)를 두고 종이를 생산했으며, 종이의 질 또한 매우 좋아 중국에까지 수출되어 명성을 떨친 것이 중국 측의 문헌에도 나타나고 있다. 먹의 경우도 묵소(墨所)를 두어 대량으로 생산했으며, 송연먹은 중국에까지 수출도 하였다.

금속활자 주조 기술 또한 우리 나라는 신라 때부터 사찰의 범종을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고 고려에 들어와서는 초기 때부터 범종이나 불상, 주화(鑄貨)의 문자 및 각종 불교 용구의 명문(銘文) 등에 대한 주성법(鑄成法)을 터득하고 있어 활자를 주조해 낼 수 있는 전제적 요건이 갖춰져 있었다. 주화를 만드는 방법이 활자 주조의 방법과 같은 점을 고려한다면 활자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중국에서 11세기 전반에 만든 교니활자의 조판술의 이점이 고려에 이미 전해졌을 것이라는 점과 성종 때부터 이미 주화를 만들었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은 늦어도 고려 정부가 강화로 옮겨 간 고종 19년(1232) 이전이었을 가능성을 충분히 시사해 주고 있다.

이처럼 금속활자를 만들게 된 사회적 배경이 분명한 데도 불구하고 금속활자의 발명이나 처음 사용한 일에 관한 기록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 않고 다만 금속활자의 실물만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는 우리 나라가 여러 번의 병란을 겪으면서 불타 버렸거나 없어져 버린 까닭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전해 오는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실물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개성박물관에 각각 한 개씩이 있다. 이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속활자는 개성의 개인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기록된 '복(복)'자인데, 이를 흔히 '고려 복자'라 일컫는다. 이 활자를 언제, 누가, 어떤 목적과 용도로 만들었는지 등은 기록이 전혀 없어 알 수 없지만, 고려의 금속활자를 실증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는 자못 크다.

이 활자는 옥편이나 자전에도 나오지 않은 벽자여서 개인의 이름자와 관련되어 주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활자의 모양은 주조 방법이 매우 미숙하여 글자의 획이 고르지 않고 좌우와 상하 사이의 길이도 차이가 있어 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하다. 활자의 뒷면은 타원형으로 움푹 파여 있는데, 이는 그 곳에 밀랍이 꽉 차서 굳어지면 인쇄 도중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금속의 소요량도 줄이고자 하는 슬기가 작용되었음을 엿보게 해 준다.

그러나, 고려가 원의 굴욕적인 지배하에 놓이게 되자 중앙 관서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점차 마비되고 지방관서나 사찰 등에 의해 그 명맥을 겨우 유지해 나갔다. 고려말에 이르러 원의 지배력이 약화됨에 따라 배원(排元) 사상이 싹트고 주권 회복 의식이 대두되자 종전처럼 서적포를 설치하고 금속활자를 만들어 경사(經史)는 물론 의서, 병서, 율서 등을 고루 찍어 학문을 권장해야 한다는 건의가 제기되었다.

그 결과 마침내 공양왕 4년(1392) 정월에 서적원(書籍院)이 생기고 금속활자 인쇄 업무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까지 마련되었으나, 그 해 7월 이성계에 의해 왕조가 교체됨으로 인해 성과는 별로 크지 못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 금속활자 인쇄에 대한 기록

고려시대 때 금속활자[鑄字] 인쇄를 했다는 기록은 약간의 문헌을 통해 나타나고 있고 그 인본(印本)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지만, 어느 때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형태와 글자체가 어떻게 된 것이며, 활자가 어떤 재료로써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현재 전해오고 있는 기록이나 관련 문헌 중 고려시대 금속활자 인쇄와 관련된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이 책은 고려 때 찍은 금속활자본은 남아 있지 않으나 그 활자본을 뒤집어서 다시 목판에다 새긴 복각본이 전해오고 있어 고려 때 활자로 찍은 책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이 책은 원래 남명선사 법천(法泉)이 선종(禪宗)의 계송(繼頌)한 것을 금속활자로 인쇄한 것이지만,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현재 전해 오는 인본은 비록 금속활자본은 아니지만, 권말에 "증도가는 선문(禪門)에서 매우 긴요한 책이므로 공인을 모집하여 금속활자본을 거듭 새겨 오래 전하고자 한다. 고려 고종 26년(1239) 9월 상순에 중서령(中書令) 진양공 최이(崔怡)가 삼가 기록한다"라는 간기가 적혀 있어, 본 서가 금속활자본을 다시 새긴 것임을 밝혀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게 하는 것은 앞서 인출된 금속활자본을 몽고군이 쳐들어 와 강화로 천도한 1239년에 목판본으로 거듭 새겨 펴냈으니, 그 바탕이 되는 활자본은 천도 이전 개경에서 인출된 것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피난 중에는 모두가 전란을 수습하는 일 외에는 여유가 없었을 터인데, 기술상 고도의 창의력이 필요한 금속활자 인쇄를 행하였다는 것은 천도 이전, 적어도 13세기 초기부터 이미 활자 인쇄술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본 서의 간기가 최이의 글이라는 점에서 더욱 신빙성이 가게 하는데, 최이는 당시 무인 정부의 제일인자였던 최우(崔瑀)의 개명(改名)이다.

본 서는 판각 후 세월이 흘러 글자 획에 나무 결이 생기고 어떤 것은 글자 획이 끊기거나 일부가 마멸된 것도 나타난다. 그러나 글자를 새긴 솜씨가 정교한 편이며 또한 번각한 중앙 관판본이기 때문에 금속활자본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는 우선 글자의 모양이 비교적 가지런한 점에서 활자의 특징이 인지되고, 본문의 행렬이 바르지 않고 좌우로 들락거렸거나 삐뚤어졌으며, 윗 글자의 아래 획과 아랫 글자의 윗 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것이 없는 점 등을 들 수가 있다.

금속활자 인쇄에 관한 초기의 자료가 별로 전해지지 않은 오늘날, 본 서는 고려 중앙관서의 금속활자 인쇄 시기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현존 자료 중 가장 앞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2) 상정예문(詳定禮文)

이 책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崔允儀) 등이 왕명을 받들어 고금예의 제도의 같고 다른 점을 참작 절충하여 만든 50권으로 된 예서(禮書)이다. 이 책을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것은 이규보의 문집인《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에 진양공 즉, 최이(崔怡)를 대신하여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라는 글에 의하여 알 수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상정예문 50권이 이미 출간되었는데 천도할 때에 한 벌만을 가져오게 됨에 따라 최이가 금속활자로 25부를 찍어서 여러 관청에 두도록 하였다"고 되어 있어 50권이나 되는 많은 분량을 금속활자로 25부나 찍어냈음을 알게 되었다. 즉, 이 책이 몽고군의 침입 후 강화로 옮기는 과정에서 소실될 위기에 처하자 금속활자로 25부를 찍어 여러 곳에 나누어 소장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규보가 지은 글 끝에는 이 글을 지은 날짜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 역사서에는 대부분 고종 21년(1234년)에 인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기록은 정확하지 않으며, 다만 고려가 강화로 옮겨 간 고종 19년(1232)부터 금속활자본의 발문을 쓴 이규보가 서거한 해인 동왕 28년(1241)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전란의 혼란 속에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기술적으로 어려운 조판을 고안해 내기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강화로 천도한 후 얼마되지 않아 금속활자로써 서책을 인출하였다 하더라도 금속활자는 천도 이전에 이미 주조된 것이거나 금속활자 제조에 대한 자료나 기술적 준비는 이미 그 이전에 완료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된다.

금속활자가 만일《상정예문》을 인출할 무렵 처음으로 고안된 것이라면 이규보도 그 편리하고 기묘한 금속활자 인쇄에 대해 다소라도 언급했을 법한데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은, 우리 나라의 금속활자 인쇄가 이미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지 않았나 함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다만, 이 책이 현재 전해 오지 않고 있어 내용이나 생김새를 알 길이 없으며, 이를 찍은 금속활자 또한 누가 언제 어떤 재료에 의하여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길이 없다.

3)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화상초록불조직심체요절(白雲和尙抄綠佛祖直心體要節). 이책은 고려 우왕 3년(1377) 청주에 있었던 흥덕사(興德沙)에서 간행한 것으로 현존하는 세계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다.

이책은 1972년 '세계 책의 해 '를 기념하기 위한 전시회에 출품되어 세계에서 가장오래된 금속 활자 임이 밝혀졌다. 우리나라는 이미 13세기 초에 금속활자를 사용하였으나,실물로서는 이 책이 가장오래된것이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소장.


이 책은《상정예문》의 발미를 쓴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다. 이 책을 활자로 찍은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활자본을 뒤집어서 복각한 것으로 믿어지는 책이 전해오고 있어 금속활자로 찍은 책도 있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현재 전해오고 있는 이 책은 모두 53권인데, 전집(前集) 41권은 이규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편찬되었고 후집(後集) 12권은 이규보의 사후에 전집에서 누락된 것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이 중 전집 부분만이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을 복각한 것이다.

이 책의 서두에는 이규보가 앓아 눕자 진양공 최이가 공인을 모아 문집을 단시일에 인쇄토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당시에는 이미《상정예문》과 같은 책들을 금속활자로 찍었던 때이므로 많은 책을 빨리 찍어내기 위해 활자로 인쇄토록 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밖에 고려시대 중기 이전의 금속활자 인쇄와 관련된 인쇄물로는 의종 14년(1160)경에 당나라와 송나라 때의 좋은 글을 모아 금속활자와 목활자를 섞어 찍은 것으로 보이는《고문진보대전(古文眞寶大全)》와 충렬왕 때에 금속활자와 동판을 사용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심요법문(心要法門)》등이 전해 오고 있다.

(3) 직지(直指)

1)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고려시대에 간행된 금속활자본으로 유일하게 현재 전해 오고 있는 것으로는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직지(直指)》가 있다. 본서는 원래 상·하 두 권이었으나 상권은 전해 오지 않고 하권만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책은 프랑스 모리스 꾸랑(Maurice Courant)이 1901년에 발행한《한국서지(韓國書誌)》의 부록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이라고 처음 소개되었으나, 그 실물을 접할 길이 없어 존재 여부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러던 중 1972년 '세계 책의 해'를 기념하기 위해 유네스코 주관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는 '특별 도서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본 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朴炳善) 여사가 본 서를 전시회에 출품함으로서 처음으로 공개되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은 1887년 주한 프랑스 대리공사로 서울에 근무했던 꼴랭 드 플랭시(Collin de Plancy)가 수집해 간 많은 장서 속에 들어 있던 것으로, 그 뒤 도서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Henri Vever)의 수중으로 넘어 갔다가 1950년 그가 사망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어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본 서의 권말에는 '선광(宣光) 7년 정사(丁巳) 7월 일 청주목외(淸州牧外) 흥덕사(興德寺) 주자인시(鑄字印施)'라는 간기가 적혀 있어 인쇄시기와 인쇄장소, 인쇄방법 등을 알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이 중 선광은 북원(北元)의 연호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해당되며, 이때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냈음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다.

청주고인쇄박물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한 흥덕사가 있던 곳에 세워져 이 곳이 인쇄문화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고 있다.


또한, 이면에는 '연화(緣化) 문인(門人) 석찬(釋璨) 달잠(達湛), 시주(施主) 비구니(比丘尼) 묘덕(妙德)'이라는 표시가 있다. 간기는 뒤에 중간(重刊)하면서도 원본의 기록대로 전재하는 경우가 있지만, 사찰본에 있어 조연(助緣) 문인 시주 등은 대체로 올바르게 표시하고 있다.

석찬은 본 서를 지은 경한(京閑)의 제자로서 스승의 다른 찬술인《백운화상어록》을 집록(輯錄)한 수제자이며, 본 서를 금속활자로 인쇄한 다음해 여주 취암사에서 다시 목판본으로 간행할 때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달잠도 석찬과 함께 취암사에서 그 어록을 간행하는데 조연한 문인이며, 묘덕도 어록의 개판은 물론 본 서를 목판본으로 간행하는 일을 전적으로 도와서 완성을 보게 한 인물이다. 이렇듯 조연 문인 및 시주가 바로 당대의 인물들이니 본 서가 간기대로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 책은 간기에 청주목의 교외에 있는 흥덕사에서 찍어낸 책이라고 되어 있으나 한동안 흥덕사의 정확한 위치를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1985년 청주시 운천동 일대에서 택지를 조성하다가 금당지(金堂址)의 유구와 함께 '흥덕사(興德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을 수습함으로서 비로소 그 위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현재 이 곳에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이 세워져 인쇄 문화의 발상지임을 기념하고 있다.

2) 서지(書誌)적 특징

《직지》는《직지심경》,《직지심체요절》등으로도 불리지만 원래의 책이름은《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로, 백운화상(법명은 경한)이 불법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여러 책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요점만을 간추려 펴낸 책이다.

이 책은 현재 금속활자본과 목판본 두 종류가 전해오고 있다. 금속활자본은 1377년 7월에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것 중 하권만 전해 오고, 목판본은 그 이듬해 여주 취암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상·하권 모두가 현재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금속활자본 중 현존하는 하권은 지방의 사찰에서 전통적인 주조 방법으로 활자를 만들어서 인쇄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볼 때 기교와 솜씨가 미숙한 초기 활자본의 성격과 특징을 나타내 주고 있는데, 두드러진 서지적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글자는 중간 자와 작은 자의 두 종류로 중간 자는 본문에, 작은 자는 세주와 본문의 중간 자가 없는 경우에 보충하였다. 활자의 주조가 정교하지 못해 글자 획의 굵기와 가늘기에 차이가 있고, 크기와 모양 또한 가지런하지 못하며, 같은 판면 내에는 같은 글자가 없으나 다른 판면에는 같은 글자도 있다. 이같은 주조 방법과 기술은 조선조 중앙 관서의 주조 방법과 다르며 그 기술이 사뭇 미숙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본문의 행렬이 곧바르지 않고 글자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것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런가 하면 일부 글자는 거꾸로 식자된 것도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으며, 글자가 아예 빠진 곳도 있다. 그리고 식자한 활자의 높낮이가 일정하지 않아 찍힌 글자의 먹색이 진하고 연한 차이가 심한데 어떤 글자는 획의 일부가 찍혀지지 않은 것도 있다.

셋째, 인쇄판은 광곽(匡郭)과 계선(界線)이 하나로 고착된 두 개를 만들어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한 페이지는 11행이지만 각 행의 글자 수는 활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18∼20자로 1∼2자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옆줄의 글자가 수평을 이루지 못하고 위 아래로 출입이 생기고 있다. 어떤 글자는 윗 글자의 아래 획과 아랫 글자의 윗 획이 서로 닿거나 엇물린 것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서지적 특징은 결국 활자의 주조 방법이 조선조의 고도로 발달한 방법과는 사뭇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활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조판법도 미숙한 초기 활자본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데서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본 서를 인출한 금속활자를 어떻게 주조했는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전해오는 바가 없다.

다만,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찰에서 행해졌던 주물을 부어 활자를 만드는 방법에 의거해 본 활자의 주조 방법을 추정해 보면, 글자 모양을 정제된 밀랍의 한쪽 면에 새긴 후 쇳물의 높은 열을 견딜 수 있는 찰흙을 덮어 씌워 주형을 만든 다음 여기에 쇳물을 부어서 활자를 만들고, 이를 잘 다듬어서 완성시켰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때 밀랍으로 만든 어미자는 주형을 구울 때 녹아 없어지므로 같은 글자라 하더라도 똑같은 모양이 거의 없다. 본 서에서도 한 판면의 동일한 글자에 똑같은 글자 모양이 보이지 않고 크기와 획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음이 보이는데, 이는 전통적인 사찰 주물법에 의해 주조된 것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본 서는 금속활자로 찍어냈음에도 활자 주조와 조판 기법이 미숙하여 인출 부수는 별로 많지 않았던 듯 하다. 이는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책을 이듬해 문인(門人)들이 또다시 취암사에서 목판으로 새겨 판본을 오래 간직하며 보다 많은 책을 찍고자 한 데서 짐작해 볼 수 있다.

3) 의의와 가치

현존하는《직지》의 금속활자본은 지방의 일개 사찰에서 찍어 낸 것이기 때문에 활자본 초기의 미숙한 성격과 특징을 지니고 있지만, 인쇄 문화사적인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이 그 의의와 가치가 지대하게 평가되고 있다.

첫째, 고려의 금속활자본 중 유일한 실물이 서구의 책 전시회에 출품됨으로서 우리 선조들이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 인쇄를 창안하고 발전시킨 문화 민족이었음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렸다는 점에서 가장 큰 의의가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이 문화 민족임을 상징함에 있어서 지식과 문화를 전파 보급하는 매체인 금속활자 인쇄를 발명했다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둘째, 13세기 전기에 보급되었던 중앙 관서의 금속활자 인쇄가 원(元)의 지배로 그 기능이 사실상 마비되고 말았는데, 그런 와중에서도 지방의 사찰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냄으로서 고려 금속활자 인쇄의 맥락을 이어 주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임을 실증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셋째, 지방의 일개 사찰에서 금속활자로《직지》를 인쇄해 낼만큼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상당한 수준까지 발전되고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기술이 조선시대로 계승되고 단계적인 계량 과정을 거쳐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종류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우리의 인쇄문화를 크게 발달시켰음은 물론 이러한 기술이 이웃 나라의 인쇄문화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금속활자를 세계에서 최초로 발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널리 사용해 온 선구자로서 영예를 자랑할 수 있으며, 그 증거물인《직지》야말로 우리 민족이 세계에 널리 자랑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인 것이다.

(4) 외국의 금속활자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계 인쇄학적 관점에서 중국과 서구의 그것들과 비교하면 그 창의성과 우수성이 더욱 돋보인다.

중국의 활자인쇄는 북송조의 필승(畢昇)이 경력(慶歷) 연간(1041∼1048)에 만든 교니활자(膠泥活字)에서 비롯된다. 이 활자는 진흙을 얇게 만들어 그 위에 글자를 새긴 다음 하나씩 떼어 내어 불에 구어 굳어지게 하였다. 교니활자의 발명은 활자판의 이점을 처음으로 인식시켜 준 점에서는 의의가 크지만 활자 인쇄로서는 실용화되지 못하고 하나의 시도작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는 진흙을 구워 활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내구성이 없고 잘 부셔져 계속적인 사용이 어려운 탓에 곧바로 폐기된 점으로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교니활자에 의한 인쇄 시도는 우리에게 활자 인쇄의 이점과 조판 지식을 얻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던 듯 하나, 활자를 만드는 방법이 금속활자 주조법과는 전혀 다르고 조판법 또한 사뭇 달라 우리의 활자 창안과 활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고려 금속활자 인쇄술의 창의성이 여실히 부각된다.

중국에서 금속활자 인쇄를 처음으로 성공하여 책을 간행했다는 기록과 함께 실물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명대의 홍치(弘治)·정덕(正德) 연간(1488∼1521)인데, 그것도 관서가 아니고 민간 출판업자에 의해 이루어진 탓에 그 기술이 매우 미숙하여 글자 모양이 불균정하고 판면도 정밀하지 못하여 우리 나라의 것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현존하는 중국의 동(銅) 활자본은 활자의 모양과 글자의 행렬, 먹색의 짙고 옅음의 정도 등에서 우리의 금속활자본과 그 특징이 매우 흡사하다. 이들 활자본들은 중국의 서지학자들도 언급하고 있듯이 송대의 교니활자를 계승 발전시키지 못하고, 훗날 우리 나라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 나라에서 금속활자 및 인쇄 도구 등과 함께 각종 전적을 대량으로 빼앗아갔다. 이때 가져 간 활자로 1593년에《고금효경(古今孝經)》을 찍었으나 판을 짜는 일과 금속활자에 잘 묻는 유성먹을 준비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듯 몇 부 밖에 찍어내지 못한 까닭에 그 기록은 있으나 인본은 전해 오지 않고 있다.

그 뒤 1597년에는 우리 나라의 동활자를 모각한 목활자를 만들어 많은 책을 찍어냈으며, 161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동활자를 만들어 처음으로 활자본을 간행함으로서 16세기 말엽까지 목판 인쇄가 고작이었던 일본에 인쇄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한편, 서구에서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최초로 주조하여 인쇄했다는 활자본이 다수 전해오고 있다. 이 중 정확한 발간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1440년대의 말기에 처음으로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인쇄하였다는《세계심판》과《천문력》그리고 1455년을 전후한 무렵에 찍어 낸《42행 성서》등이 초기의 활자본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조선시대에 들어와 최초로 주조한 계미자(癸未字 ; 1403년)보다도 40년 이상이나 뒤의 것에 해당하니 고려시대 때 간행된 금속활자본과는 아예 비교할 나위도 못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려의 금속활자 인쇄술이야말로 발상 시기로 보나 독창성을 발휘하여 슬기롭게 발전시켰던 점으로 보나 단연 세계에서 으뜸임을 확인케 하며, 우리 민족의 창의성과 우수성을 재확인시켜 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