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인쇄

1. 초기 인쇄술과 불경인쇄

(1) 초기의 인쇄술

1) 고려 인쇄술의 계승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고려의 제도를 많이 답습하였는데, 각종 서책을 인출하는 일을 관장하는 관직도 고려 공양왕 4년(1392)에 설치된 서적원(書籍院)의 명칭을 그대로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담당하는 관원들의 직제도 대부분 그대로 두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대장경 판의 인쇄나 각 사찰의 간경사업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태조가 즉위했던 기간에는 서너 종의 대장경 판이 판각되었으며 왕사(王師)였던 무학(無學)대사의《주심부(註心賦)》를 복각하기도 하였다.

태조 7년(1398)에는 왕이 용산에 친히 나가 강화도 선원사에서 운반되어 온 고려의 재조 대장경 판을 맞이한 다음 서울 서대문 밖의 지천사에 소장했다가 곧이어 합천 해인사로 이관케 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동왕(同王) 13년에는 해인사 대장경 판을 인출하기 위하여 각 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경지(經紙)를 만들게 하여 대장경을 인출하고, 그 장경을 경기도 양주의 개경사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태조에서 태종 대에 이르는 조선조 초기에는 불경판 외에도 다른 서책들의 관판본과 사판본들의 간행이 상당히 성행하였다. 태조 대에는 계림부에서 중간(重刊)한《삼국사기(三國史記)》나 조준(趙浚) 등의《경제육전(經濟六典)》, 권근(權近)의《입학도설(入學圖說)》이 간행되었고, 정종 대에는《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이 간행됐다.

태종 대에는 평양부에서 인출한《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 권근 등이 편수한《동국사략(東國史略)》, 이숭인(李崇仁)의 유고집인《도은문집(陶隱文集)》, 고려 이승휴(李承休)의《제왕운기(帝王韻記)》등 많은 서책들이 관판으로서 중앙 및 지방 관서에서 간행되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사판본으로 볼 수 있는 서책으로는 태조 대에 정도전(鄭道傳)의《경제문감(經濟文鑑)》,《삼봉집(三峯集)》이 간행됐으며, 정조 대에는《유항선생시집(柳巷先生詩集)》, 태종 대에는《길재선생시권(吉再先生詩卷)》,《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등 많은 책들이 인출되었다.

이처럼 조선 건국 초기의 인쇄술은 서책을 인출하는 기관의 관제(官制)부터 불전(佛典)의 조조, 서적 인쇄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거의 고려시대의 인쇄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초기의 목활자 인쇄

조선 건국 이후 인쇄 업무를 관장하던 기관은 고려 공양왕 때 설치된 서적원과 그 직제인 영(令)과 승(丞) 등을 그대로 이어 받아 활용했지만, 건국 후부터 태종 3년(1403) 계미자가 동활자로 주조되기 전까지 12년 동안에 금속활자로써 서책을 인출했다는 자료는 발견할 수 없다. 이는 신구 왕조의 교체로 인한 혼란기였기에 서적원에서 인쇄 업무를 실시할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계미자가 주조되기 전의 조선 건국 초기에는 주로 목판이나 목활자를 만들어 서적을 인출했다. 이 무렵에 간행된 목판본으로는 태조 4년에 찍은《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券)》등이 있으며, 목활자본으로는 태조 4년에 간행된《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태조 6년에 목판본을 목활자본으로 다시 찍은《개국원종공신공록권》등이 있다. 같은 개국공신 녹권이면서도 전자는 목판본으로 되었고 후자는 목활자본으로 되었는지의 이유를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당시의 활자 인쇄 기술로 보아 한꺼번에 많은 수량을 인출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므로 수량이 많았던 태조 4년의 녹권은 목판으로 하고 수량이 적었던 6년의 녹권은 간편하게 목활자로 인출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중《대명률직해》를 찍은 목활자는 건국 초의 혼란기에서 인쇄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서적원을 대신하여 지방 관서에서 만들어 바친 것으로 서적원자라고 하고, 녹권을 찍은 활자는 중앙관서에서 만든 것으로 녹권자라 부른다. 목활자본은 대체로 글자체가 고르지 않고 나무 결이 나타나 있지만, 이들 책들은 조선조 초기 목활자본의 실증적 자료로서 매우 귀중한 만큼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3) 유서(儒書)의 판각

조선 초기의 태종 대에 해당하는 명나라의 영락(永樂) 연간에 중국에서는 한·당·송 이래의 유서들을 총 취합하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및 성리대전(性理大全) 229권을 편찬했다. 이 책들은 당시의 학자로서는 반드시 정독하여야 할 귀중한 유교 경전의 주해서일 뿐 아니라 인본은 지질이 매우 우수하고 판면과 글자체, 글자 획의 새김이 정교하며 표지 장정 또한 훌륭한 도서미를 갖추고 있다.

본 서가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세종 원년(1419)인데, 당시에는 곧바로 번각되지 못하여 종래부터 전해 오던 사서와 오경의 판본들이 활용되고 있었다. 그런데 세종 8년(1426)에 본 서를 명으로부터 또다시 가져오게 되자 왕명으로 이를 각 지방관서에서 나누어 간행토록 하였는데, 본 인본 229권 중 경상도는 성리대전과 역서대전·춘추대전을, 전라도는 시대전 및 춘추대전, 예기대전을, 강원도는 사서대전을 각각 판각하였다.

이 때 간행한 본 서의 초간본은 명의 영락 판본을 모각(模刻)한 것으로 보이지만, 글자 획은 훨씬 정교하며 용지 또한 엷고 질긴 순백의 닥종이를 사용하여 오늘날까지도 선명한 묵흔(墨痕)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의 인쇄술 및 먹의 제조기술이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그 후 본 서의 각판들은 각 도에서 취합해 중앙의 주자소에 보관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주자소에서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각종 서책을 인쇄한 외에도 지방에서 올라온 목판본도 함께 관리하면서 서책을 인쇄했음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유교가 번성했던 조선시대에는 많은 유서(儒書) 중에서도 사서와 오경 및 성리대전은 경향 각지를 통해 가장 많이 읽혔으므로 주자소에 이관된 후에도 수요에 따라 수차에 걸쳐 중인 하였으며, 각 지방에서도 많은 번각본들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번각본들 중에는 초간본의 면모를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품격이 현저히 저하된 것들도 많이 있다.

주자소에 보관된 목각판은 서책을 인출하여 각 지역의 향교 등에 배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비(自費)로 비치하려는 사람에게는 용지를 가져오면 인쇄해 줄만큼 중앙 정부로서도 본 서의 인쇄 및 보급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2) 불경인쇄와 전파

1) 해인사 대장경 판의 중인(重印)

강화도의 선원사에 간직하고 있던 고려 대장경 판을 태조 7년 합천 해인사로 옮긴 이후 태종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를 중인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때는 팔만대장경의 일부분만을 인출하여 태조가 세운 양주 개경사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세조 3년(1457)에 왕은 해인사 대장경 50건을 중인할 계획을 세우고 전국 각지에서 경지(經紙)를 구입한 후 3개월의 기간을 거쳐 총 지수(紙數) 345,386권을 중인 하였다. 사용된 종이는 모두 관비를 들여 구입하고 경지 한 장이라도 민가에서 거두는 것을 엄금하였으며, 중인 되어 왕에게 처음으로 진상된 대장경 3권은 흥천사에 두었다.

이처럼 거대한 양의 인쇄를 3개월만에 완성했다는 사실은 당시 우리 선조들의 인쇄 기술의 저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가히 짐작하게 한다. 아무리 왕명이라 하더라도 거창한 인경 사업을 짧은 기간에 해 냈다는 것은 당시의 인쇄 기술이 어느 정도 발달되지 않았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때 간행된 인본들은 원래의 중인 계획대로 선조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국 각 명산의 사찰에 봉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유구국(琉球國) 등에 국제간의 수호(修好) 증품으로도 전해져 현재 일본의 증상사(增上寺) 등 각 사찰에 남아 있다.

2) 간경도감 설치와 불경 인쇄

세조는 일찍이 불경에 흥미를 느껴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석보상절(釋譜詳節)》을 편찬하였으며, 왕위에 오른 뒤에도《석보상절》과《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합하여《월인석보(月印釋譜)》를 간행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뒤 불경을 간행하려는 염원을 키워 오다가 앞서 말한 해인사 대장경 판을 중인 하여 각 사찰에 봉안하였는가 하면, 7년(1461)에는 간경사업을 더욱 활성화시키기 위해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였다. 간경도감이 설치되자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이 많은 장경(藏經)을 수집해《속장경》을 도장사(都藏司)에서 간행했던 것처럼 대장경 판 이외의 불전(佛典)들을 널리 수집하여 모인(摹印)하고 외국 불전들의 국역 간행사업도 힘썼다.

그러나 세조가 세상을 떠나자 불교를 억누르고 유교를 진흥시키고자 하는 유신(儒臣)들은 주자학으로써 국민의 지도 이념을 확립코자 하는 동시에 간경도감은 원래 잠정적으로 설치된 관서일 뿐만 아니라 불경 간행으로 쓸데없는 경비가 많이 지출된다는 이유를 들어 이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선왕인 세조의 유업을 계승하려던 성종은 유신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마침내 동왕 2년(1471)에 간경도감을 폐쇄하였다. 설립 이후 11여년 동안 많은 불경의 간행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조가 시도했던 간경의 대사업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한 채 배불(排佛)운동의 제물로써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간경도감에서는 많은 불경이 간행되었으나 의천의 속장경에서 볼 수 있는《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과 같은 장경목록이 되어 있지 않아 간행된 불경 목록의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25종의 불전과 9종의 국역본 등의 간경도감본이나 중간(重刊)본은 간본의 말미에 적혀 있는 간기로서 간행처와 간행 연대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간경도감본들은 세조의 감독 하에 간행된 것인 만큼 도서의 제작에 따르는 글자체나 글자 획, 판식, 판면, 용지 등 여러 부문에 걸쳐 도서로서 갖추어야 될 요건들에 대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이 엿보인다. 인본의 글자체는 굳건하고 육중한 촉체(蜀體)계의 것이 많고, 간기에는 대부분 필서자의 이름을 밝혔는데 당대의 명필가였던 강희안(姜希顔), 박경(朴耕) 등의 글씨체가 보인다.

판면은 원(元)판계보다는 송(宋)판계에 가까워 여유가 있고 균형이 잘 짜여 있으며, 용지는 대부분 지질이 엷은 최상급 닥종이로 되어 있어 서책으로서의 훌륭한 형체의 미를 갖춘 진인본(眞印本)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본 인본들의 제본의 형태나 표지의 장식은 현재 남아 있는 원판본이 희귀하고 설령 남아 있더라도 형태가 거의 변질되어 있어 그 원형을 짐작하기가 어렵다.

이처럼 본 인본들은 송·원판의 장단점을 절충하여 특색 있는 우리의 전통적 판본을 만들려고 노력했음을 역력히 엿볼 수 있는 만큼, 그 당시 우리 인쇄술의 발전된 척도를 가름할 수 있는 중요한 인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전해오고 있는 당시의 원각본들은 극히 드물고 그 후의 번각본조차도 흔하지 않은 실정이다.

3) 인수대비(仁粹大妃)의 인경(印經)사업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많은 불경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은 세조의 공이 지대했지만, 성종 초기에 간경도감이 폐지되고 나서도 불경의 간행사업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인수대비의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수대비는 원래 왕세자로 책봉된 세조의 맏아들(덕종)의 부인이자 성종의 어머니이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하자 세조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예종 또한 겨우 1년만에 서거하자,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인 성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성종은 왕위에 오르자 선친인 왕세자를 덕종으로 추숭(追崇)하고 대비에게는 인수왕비의 존호를 드렸다가 이듬해 왕대비(王大妃)로 봉하였다. 그러나 대비가 57세 때 성종마저 왕위에 오른지 25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인수대비는 세자빈과 왕비 그리고 왕대비의 영화를 누렸음에도 한 인간으로서의 갖은 비극과 참척을 뼈저리게 겪었다.

그리하여 인수대비는 요절한 남편과 왕위에 오른지 1년만에 서거한 시숙인 예종, 자신보다 먼저 서거한 성종의 명복을 부처님께 빌기 위하여 경판을 만들어 절에 시납(施納)코자 하였다. 이는 또한 세조가 요절한 왕세자를 위해 친히《금강경》을 짓는 등 많은 불경을 간행한데서도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생각된다.

간경도감이 성종 2년에 배불 숭유의 정책에 따라 폐지되자 그 다음해에는 대비 자신이 직접 간경사업에 간여하여 각처에 분산되어 있는 판본들의 소재처에서 각종 불전들을 복간하게 하였다. 이때 간행된 인본들은 글자체가 단정하고 글자 획의 조각이 정교한 것이 많이 보이는데 권말의 발(跋)은 거의 갑인자의 작은 글자로 인출되어 있다.

인수대비는 또한 목활자를 만들어 불전을 국역 인출하였으며 때로는 한자의 불전을 그대로 인출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목활자를 인경(印經) 목활자라고 한다. 본 목활자는《진언권공(眞言勸供)》의 발문에 의하면 "인수대왕대비가 승(僧)에게 명하여《육조단경(六祖壇經)》을 국어로 번역하고 목활자로 제작하여 300건을 인출 반시(頒施)하고, 또는《진언권공》400건을 인출하여 중외에 반시하였다"라고 적혀 있어 이러한 책들이 인수대비의 명으로 저작된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인경 목활자는 당시의 인경사업에 상당히 많이 이용되었는데, 글자 획이 고르고 글자체는 단정하고 부드러운 운치를 지닌 진체(晉體)여서 언뜻 보면 금속활자인 것처럼 보인다. 인본들은 대체로 여백이 약간 좁은 듯한 느낌이 없지는 않으나 전체의 판면으로 보아 조화가 잘 되어 있어 목활자 인본으로서는 보기 드문 훌륭한 인본이다.

4) 대장경본의 전파

불교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파된 후 백제와 고구려의 승려들이 일본에 직접 건너가 불교 발전에 힘쓴 결과 불교가 융성해졌는데, 일본은 고려 때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고려 대장경의 인본은 물론 경판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요청해 왔다.

이 때마다 경판본은 적당히 전해 주고 때에 따라서는 해인사의 경판이 아닌 지방 사찰에서 만든 경판을 전해 주기도 했으나, 대개는 장경판이 1본 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이 때 건너간 장경들은 그 종류나 수량이 상당히 많았으리라고 예상되나 문헌적으로 알려진 것으로는 겨우 10여 종을 들 수 있을 뿐이고 부수 또한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전체의 수량을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세조 대에 해인사 대장경 판 전체를 50부 중인한 뒤로부터 성종 말경까지 약 35년 동안에 13회에 걸쳐 많은 수량의 장경들이 일본과 유구국에 전해졌다. 그러나 13회 중에서 장경의 경명과 부수가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는 것이 겨우 5회뿐이고 나머지 8회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현재 일본의 증상사(增上寺)나 남선사(南禪寺)에 소장된 수많은 대장경 판본들이 세조 때 해인사에서 인출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일본에 건너간 장경들의 수량이 매우 많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때 건너간 고려 대장경들은 당시 일본의 간경 및 조판사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일본에서 대장경 판을 구하고자 보내 온 서신 중에 "우리의 대장경은 간행하기 어려워서 완비하지 못하나 조선의 간본은 조각이 극히 정교하다"라는 대목이 있어, 우리의 대장경 판이 일본의 간경 사업에 직간접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2. 금속활자의 개량과 발전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고려로부터 이어받은 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찬란한 인쇄문화를 일궈냈다. 역대 국왕들마다 금속활자를 주조하고 책을 인쇄하는 일은 중요한 문정(文政)의 하나로 여겼기에 많은 종류의 금속활자가 주조되었고 이에 따른 인본들도 많이 생산되었다. 또한, 주조된 금속활자는 종류가 매우 다양하고 수량이 많아서 활자의 명칭은 대체로 제작 년도의 간지(干支)를 따서 붙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활자를 만든 기관이나 글자체, 혹은 글자 본을 쓴 사람의 이름과 활자의 용도 등을 따서 이름을 붙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하여 전란 전과 후 사이에는 많은 차이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전란 중 중앙의 교서관을 비롯해 각 지방관서의 인쇄시설과 기구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서책을 인출하는데 쓰던 활자는 대부분 유실되고 말았다. 왜군은 많은 서책과 인쇄기기들을 전리품으로 가져갔고 인쇄에 종사하던 사람들까지 데려가 활자 인쇄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또한, 임진왜란 전까지는 금속활자 주조의 전성기로 대부분의 활자가 왕의 칙명에 따라 국가기관인 교서관 등에서 주조되었기 때문에 품질도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전쟁으로 입은 피해로 물자가 부족했던 후기에는 활자의 품격이 크게 떨어지고 사가(私家)에서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활자까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관서를 중심으로 발전되어 온 금속활자 주조 기술이 일반인에게까지 널리 보급되고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와 인쇄술은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하여 전기와 후기에 많은 차이와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만큼, 임진왜란 이전을 전기, 이후를 후기로 나누어 서술하고자 한다.

(1) 조선 전기(前期)의 금속활자

1) 계미자(癸未字)

새로 건국한 조선 왕조는 제3대 왕인 태종 대에 들어와 비로소 사회가 안정되고 문물이 정비됨으로서 왕조로서의 기틀이 잡혔다. 이에 따라 학문을 연구하려는 유생들이 크게 늘어났으나 책이 절대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자, 태종 3년(1403) 2월에 고려 말기의 서적원 제도를 본받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수개월 사이에 큰 자와 작은 자, 특소 자를 합쳐 수십만 자의 동(銅)활자로 만들어 책을 인출하였다.

본 활자는 제작된 연도의 간기를 따라 계미자라 칭하는데, 성현(成俔)의《용재총화( 齋叢話)》에는 본 활자로 서책을 인출한 해의 간기를 따서 '정해자(丁亥字)'라고 기록하고 있어, 이를 정해자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계미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처음으로 만든 금속활자이나 글자체가 크고 고르지 않아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못하고, 18년이 지난 세종 2년(1420)에 경자자(庚子字)를 주조하면서 녹여버린 탓에 더 이상의 인출 기회를 갖지는 못하였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본 활자의 인본에 의하면 글자체가 약간 큰 편이며 글자의 형태 또한 고르지 않지만 균형은 그런 대로 잘 갖춰져 있다. 글자체가 크다는 것은 글자본 자체가 큰 까닭도 있겠지만, 형태가 고르지 않다는 것은 당시 주금술(鑄金術)에 대한 전문지식이 부족하여 합금의 비율이 적당치 않은 탓에 주금이 냉각할 때 수축이 심하게 됨으로써 주형(鑄型)과 같은 글자 형태가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본 활자는《직지》를 인쇄한 흥덕사 활자보다는 개량되기는 했으나 활자 주조와 인쇄기술이 미숙했던 초기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난다. 인쇄 시에는 인판(印板) 바닥에 밀랍을 먼저 깔아 활자를 배열한 다음 열을 가해 밀랍을 녹이고 철판으로 활자를 고르게 누름으로써 활자면이 편편하게 되면, 열을 제거하고 활자가 고정되게 하여 인쇄하였다. 이러한 방법은 활자가 밀랍에 잘 꽂힐 수 있도록 해야 했기 때문에 활자의 뒤끝이 모두 송곳처럼 뾰족한 형태를 띄고 있다.

그러나, 밀랍은 속성이 부드럽고 응고력이 약해 식자가 든든하지 못한 탓에 활자가 유동되어 글자의 행이 일그러지는 결점이 있어 밀랍을 수시로 녹여서 부어야 했으므로, 밀랍의 소비량이 많으면서도 하루에 찍어내는 인쇄량도 십여 장 이내에 불과했다. 이러한 기술 조건에서도 각종 서책을 대량으로 찍어 널리 보급하였음은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본 활자로 인쇄한 인본들은 지금까지 다수가 전해 오고 있는데, 이는 고려 고종 때 금속활자를 만들어 최초로 인쇄했다는《고금상정예문》보다는 약 170년 이후이고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직지》보다도 26년 이후의 것이지만,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서양에서 금속활자를 만들어 사용한 1440년경보다는 40여 년이나 앞서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나라에서 주조한 금속활자가 세계 인쇄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경자자(庚子字)와 갑인자(甲寅字)

세종 대는 조선시대에 있어 가장 문물이 잘 정비되고 학문이 번창하였던 시기였다. 민족문화 건설의 일환으로 경자자 및 갑인자 등의 동활자를 주조하여, 명(明)에서 전해 온 유경(儒經) 판본들의 번각은 물론 법전을 비롯한 천문, 지리, 음악, 농학, 의방서 등을 간행했다. 또한,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고 각종 운서(韻書) 및 유·불교 경전의 간행사업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경자자는 세종 조에 들어와 처음으로 주조한 금속활자이다. 앞서 주조된 계미자가 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하고 글자면이 거친 탓에 인쇄 도중 흔들림이 잦아 하루에 십여장 내외밖에 인쇄할 수 없던 것을 개량하고자 세종 2년(1420)에 주조하기 시작해 2년간에 걸쳐 완성했다.

활자의 모양은 끝이 송곳처럼 뾰족했던 계미자와는 달리 네모 반듯한 입방체로 고쳤으며, 인쇄 방식에 있어서도 밀납을 판에 녹여서 글자를 배열하던 방식을 개량해 글자 모양에 알맞게 인판을 만들고 죽목(竹木)으로 각 활자의 빈 공간을 메우는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밀랍을 사용하는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인쇄량과 인쇄효과는 오히려 높일 수 있게 되어 금속활자 인쇄술의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본 활자로 찍은 인본은 현재 20여 종이 전해오고 있는데, 이중 소자(小字)로 된《유설경학대장(類說經學隊仗)》은 각 페이지는 16행, 18자 체제로 되어 있고, 중·소자로 된《사기(史記)》,《문선(文選)》,《선시연의(選詩演義)》등은 거의가 11행, 21자 체제로 되어 있다. 그러나 판심(版心)은 거의 같은 모양으로서 상하 판심에 흑구(黑口), 상하 내향 흑어미(黑魚尾), 그 안의 위에는 서명(書名), 아래에는 장수가 적혀 있다.

갑인자는 세종 16년(1434)에 앞서 주조한 경자자의 글자체가 너무 세밀하여 책을 읽기가 불편하자 좀더 큰 형태의 금속활자로 개주(改鑄)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본 활자는 관서에서 만든 금속활자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많은 인본들을 간행하였다. 또한, 활자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후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섯 차례나 개주되었기 때문에, 훗날 개주된 갑인자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이를 '초주 갑인자'라고도 일컫는다.

본 활자는 이천의 감독 아래 장영실, 이순지 등의 천문 기기를 제작하던 과학 기술자들이 명나라 초기의 간본인《논어》와《효순사실(孝順事實)》등의 글씨를 자본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훗날 세조로 즉위한 진양대군의 글씨체로 보완하여 2개월만에 20여만 자를 주조하였다.

천문 기기 제작의 일류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제작했기 때문에 글씨체가 단정하고 명확할 뿐만 아니라 활자의 모양 또한 자못 정교하다. 경자자와 비교하면 큰 자와 작은 자의 크기가 고르고 활자의 네모가 반듯하며 판짜기를 완전한 조립식으로 고안하여 밀랍을 전혀 쓰지 않고 대나무만으로 빈틈을 메우는 단계로 크게 발전시켰다. 그 결과 인쇄하기가 훨씬 쉬워져 하루의 인쇄량도 경자자의 두 배인 40여 장이나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본 활자로 찍어낸 최초의 책은 활자를 주조한 해에 인출한《대학연의(大學衍義)》인데, 현재 전해 오는 인본들을 보면 글자 획에 필력의 약동이 잘 나타나고 글자 사이에 여유가 있어 판면의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먹물도 기름먹에 아교를 진하게 섞어 찍어 글자가 한결 선명하고 깨끗하다.

초주 갑인자는 선조 13년(1580)에 재주 되기까지 장장 1세기 반에 걸쳐 조선시대 금속활자 중 가장 오래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활자가 점차 마멸되고 없어져 목활자나 다른 금속활자의 보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오래 사용되었지만 그 인본들은 활자의 정교도나 마모도, 다른 활자의 보충도 그리고 책의 판식과 지질 등을 종합 고찰하면 그 인출 시기를 추정해 낼 수 있다.

3) 훈민정음자(訓民正音字)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란 뜻으로 세종 25년(1443)에 창제하여 동왕 28년(1446)에 반포한 우리 고유의 문자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된 동기는《훈민정음(訓民正音)》의 <어제서문(御制序文)>에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뜻을 전하고자 함이 있어도 이를 글자로 표현하지 못하니 이를 딱하게 여겨 새 글자 28자를 만드나니 백성들의 일상 생활에 편리하게 쓰이게 하고자 한다"는 내용으로 잘 나타나 있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조선 세종 30년(1448)에 최초의 한글 활자로 간행했다.

세종이 훈민 정음으로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대한교과서 주시회사 소장.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어제서문과 훈민정음의 음가(音價) 및 운용법을 밝힌《훈민정음(訓民正音)》을 목판본으로 간행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최초의 한글 활자를 만들어《석보상절(釋譜詳節)》을 간행하고 이어서《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등을 간행하였다. 이때 사용된 한글 활자는 고딕체 모양의 큰 자와 가는체의 작은 자가 있으며 인본에는 갑인자와 함께 병용되고 있다. 이들 한글 활자를 통상적으로 '훈민정음자', '월인석보 한글자' 또는 '초주 갑인자 병용 한글자'라고 일컫는다.


《석보상절(釋譜詳節)》.세종이 돌아가신 소현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가의 일대기를 엮고 이를 한글로 번역하도록 한 책이다.(석보상절)은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널리 읽혀졌던 대승경전을 망라하여 한글로 번역한 국역대장경 이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조선 세종 29년 (1447)에 고딕체 한글 활자와 갑인자로 찍은 것이다.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이들 한글 활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곧바로 주조하여 우리도 고유의 문화민족임을 상징케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매우 크다. 현존하는 인본을 보면 유려하고 부드럽게 운필된 필서체인 초주 갑인자와 강직하게 직선으로 그은 인서체인 한글 활자가 서로 조화 있게 배열되어 그 우아함과 정교도에 있어 우리 나라 금속활자본 중 백미임을 자랑할 만 하다.

이 중 특히《석보상절》은 세종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동왕(同王) 29년(1447)에 수양대군에게 명하여 석가의 일대기를 엮고 이를 한글로 번역한 책인데, 한글 활자가 처음으로 사용되어 인출된 서책이라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여, 대한인쇄문화협회는 1988년 창립 40주년 기념 사업으로 이 책이 간행된 날(9월 14일)을 '인쇄문화의 날'로 제정해 매년 기념해 오고 있다.

또한,《월인천강지곡》은 세종이 훈민정음으로 지은 장편 서사시로 자신의 불교 신앙을 표현한 것이지만 백성들에게도 불교의 진리를 쉽게 깨우치도록 지은 책인데, 인본은 고딕체인 한글 활자와 갑인자가 잘 조화되어 있다. 우리 나라가 1991년 유엔에 가입했을 때 증정한 기념품이 바로 이 책의 인쇄 동판으로, 우리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게 되었다.

4) 병진자(丙辰字)와 경오자(庚午字)

병진자는 갑인자의 글자 모양이 좀 세밀하므로 보기가 다소 어렵다 하여 세종 18년(1436)에 훗날 세조로 즉위한 진양대군의 글씨로 대자(大字)로 만들어진 후 갑인자와 함께 사용되었다. 본 활자는 글자형이 다른 활자에 비해 상당히 큰 편이었으므로 일반 서적의 인쇄에는 적당하지 않고 강목자 등에 주로 쓰였기 때문에, 이를 '강목대자(綱目大字)'라고 부르는 이도 있다.

《용재총화》에는 본 활자가 납(鉛)을 녹여 모뜬 본에 부어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구텐베르크의 납활자보다 앞서 제작된 세계 최초의 납활자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활자가 전혀 전해 오지 않는 탓에 그 재질과 형태 등을 확인할 수는 없다.

경오자는 세종의 왕위가 끝나는 32년, 즉 문종 즉위 원년(1450)인 경오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문종 2년, 즉 단종 즉위 원년인 임신년에 완성된 활자로 임신자(壬申字)라고 하기도 한다.

본 활자는 문종이 글자체가 작아 활용도가 낮았던 경자자를 녹이고 안평대군의 글씨를 글자 본으로 하여 다시 만든 활자이다. 그러나 이는 문종이나《단종실록》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성종실록》에서 여러 금속활자를 논하는 중 "경오자는 매우 좋으나 안평대군이 쓴 까닭으로 이를 녹여 버리고 강희안이 쓴 글자로 개조한 것이 을해자(乙亥字)이다"라는 데에서 그 이름이 처음으로 나온다. 또한,《정조실록》에도 "세종 조에는 경자자와 갑인자가 있고, 문종 조에는 임신자가 있으며, 세조 조에는 을해자와 을유자가 있었다"라고 적혀 있어 경오자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본 활자는 문종 원년인 경오년에 주조되었으나 세조 즉위 원년인 을해년에 강희안이 쓴 을해자로 개주 되었으므로 사용된 기간은 겨우 6년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빨리 폐기된 이유로는 경오자의 글씨체가 송설체의 대표적인 것임을 들어 친명반원(親明反元)이라는 당시의 외교적 관계와 결부시키기도 하지만, 세조 때 주조된 을해자와 을유자도 송설체임을 고려한다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보다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다 죽임을 당했던 안평대군의 글씨체여서 세조가 즉위하자 녹여 버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비록 짧은 기간 사용되었다 하더라도 새로 만들어진 활자인 만큼 인본이 상당했을 것이지만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는 본 활자의 인본은 매우 희소하며, 그나마 대부분이 일본에 있고 국내에는 겨우 잔존본이 산재할 뿐이다.

5) 을해자(乙亥字)와 을유자(乙酉字)

을해자는 세조가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원년(1455)에 안평대군이 쓴 경오자를 녹인 후 강희안의 글씨를 글자 본으로 하여 개주(改鑄)한 활자이다. 글자 본을 쓴 강희안(姜希顔)은 당대의 명필가로서 진체와 촉체를 겸한 서법에 능할 뿐 아니라 조선시대 전기의 3대 회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의장과 필치가 탁월했는데, 을해자는 촉체인 송설체(松雪體)보다는 진체인 해서체(楷書體)에 가까운 편이다. 글자체는 대체로 폭이 길이보다 조금 넓은 듯 하나 획이 굵고 필치가 곧다.

본 활자에는 큰 자, 중간 자, 작은 자의 3종류가 있는데, 중간 자와 작은 자는 균형이 안정되어 인쇄에 적합한 까닭에 갑인자와 함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란 후에도 을해자체 목활자를 만들어 혼용하면서 실록 인출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인본이 매우 많이 전해오고 있다. 큰 자는 가로 세로가 모두 2㎝이며, 중간 자는 세로 1.2㎝, 가로 1.5㎝이고, 작은 자는 세로 1㎝, 가로 0.7㎝이다.

이 가운데 강희안의 서체 특색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중간 자인데, 중간 자는 큰 자와 작은 자에 비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작은 자는 주로 중간 자의 아래에 두 줄의 주를 다는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폭이 좁게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본 활자로 찍은 인본은 몇 종의 큰 자나 작은 자로 찍은 것 외에는 대부분 중간 자 또는 중간 자 및 작은 자로 되어 있다.

을유자는 세조 11년(1465)에 왕명에 의해 중앙 관서에서 주조한 활자이다. 글자 본은 초서에 능하고 촉체도 잘 쓴 정란종(鄭蘭宗)의 글씨로 만든 탓에 글자체는 굳세고 부드러운 필치를 가졌지만, 활자 모양은 대체로 고르지 않다.

본 활자는 원각사를 준공하고 곧바로《대방광원각수다라료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經)》을 찍기 위해 주조된 것인데, 구결(口訣)을 달기 위해 한글 활자도 만들었다. 그러나 불경을 찍기 위해 만든 활자라는 점 때문에 유생들이 사용을 기피해 갑진자가 개주될 때까지 20여 년밖에 사용되지 않아 인본이 매우 희소하다.

막대한 국비를 들여 만들었을 활자를 이처럼 쉽게 폐기한 또 하나의 이유로는 명나라의 배원(排元) 정책에 영합하고자 원나라의 전통 서체인 촉체를 억압하고 명나라에서 많이 사용했던 진체를 권장코자 하는데 있었던 것으로도 여겨진다.

6) 갑진자(甲辰字)와 계축자(癸丑字)

갑진자는 성종 15년(1484)년 을유자를 녹여서 큰 자부터 만들기 시작하여 다음 해에 작은 자까지 완성함으로서 30여만 자를 주조하였다. 활자체는 갑인자나 을해자보다 소형인데, 인서에 알맞도록 글자형의 짜임새가 잘 되어 있다. 글자 본은《구양공집(歐陽公集)》과《열녀전(列女傳)》에서 발췌하고 부족한 글자는 박경(朴耕)이 써 보완하였는데, 이로 찍은 인본은 지금까지 다수가 전해오고 있다.

본 활자를 주조한 동기는 당시 주로 쓰고 있던 갑인자와 을해자의 글자체가 커서 종이가 많이 들고 권질이 무거워 불편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활자들은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까닭에 인쇄가 처음과 같이 깨끗하지 못했으며, 특히 을유자는 활자의 주조 동기가 불경 간행이었다는 점에서 유생들이 사용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활자의 굵기와 크기가 적절하고 글자체가 명확한 것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동기에서 새로 만들어 냈기 때문에 종래의 어느 활자보다도 크기가 아주 작으면서도 모양이 단정하고 예쁘며, 인본도 종이가 사뭇 덜 들고 책이 작아 가벼우므로 휴대하기가 편리하다.

갑진자는 갑인자와 을해자 다음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인본도 적지 않게 전해오고 있다. 이들 인본을 보면 초기에 인쇄된 것은 활자체가 단정하고 정교하나 중종조 이후의 것은 보주가 많아지고 활자의 획이 가늘어 쉽게 마모된 탓에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며 판독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계축자는 성종 24년(1493)에 새로 주조된 활자이다. 그러나 본 활자의 주조 기록이《 성종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성현의《용재총화》에 "성종이 중조신판강목자(中朝新板綱目字)를 활자본으로 하여 계축자를 주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주조된 유래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본 활자는 명나라의 새로운 판본인《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글자 본으로 삼아 큰 자와 작은 자의 두 종류를 만들었다. 큰 자와 작은 자를 다같이 크게 하여 전체적으로는 획이 굵고 단정한 진자체이지만, 큰 자는 극단적으로 굵고 크며 작은 자는 큰 자에 비해 너무 작아 활자로서의 균형이 잘 짜여 있지 않다.

또한, 본 활자는 글자가 너무 작고 획이 가늘어 쉽게 마모된 탓에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한 갑진자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음에도 주조 솜씨는 오히려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중종 중기까지 40여 년 동안 사용되면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등을 인출해 냈다.

7) 성종실록자(成宗實錄字)와 병자자(丙子字)

조선시대의 왕조 실록은 4부씩 정사(正寫) 또는 인쇄하여 춘추관·전주·충주·성주의 각 사고(史庫)에 분장하였는데, 태조부터 태종의 3대의 실록은 사본(寫本)으로 되어 있고 세종부터 예종까지의 실록은 을해자로 인출되어 있다. 을해자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세조 원년에 주조한 것인데, 실록에만 전용된 활자가 아니고 일반 인서의 간행에도 널리 이용되었다.

그러나 성종부터 명종에 이르기까지 5대의 실록은 인출된 시기가 각각 다름에도 같은 활자로 인출되었는데, 이 활자를 총칭하여 '성종실록자'라고 부른다. 본 실록자는 어느 때 주조되었는지 문헌적으로 명확히 고증할 수 없으나 초인본인《성종실록》이 연산군 5년(1499)에 편찬된 점을 감안한다면 이미 그 이전에 만들어졌으리라고 믿어진다.

본 활자는 진체(晉體)인데 글자형이 중소형으로 되어 있어 서책의 인쇄에 가장 알맞은 형체이다. 본 활자의 인본은 실록 이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인출된 실록 인본들은 각 페이지마다 16행이고 1행은 36자로 된 장방형 형태를 띄고 있다.

병자자는 선조들이 만든 금속활자를 잘 보관하지 못하여 간간이 유실되고 이들을 목활자로 보충하였으나 마모가 심해 인쇄에 어려움을 겪자, 중종 11년(1516)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고 만들기 시작했으나 사정상 일시 중단하였다가 동왕 14년(1519)인 기묘년에야 완성하게 되었으므로, 본 활자를 기묘자(己卯字)라고도 부른다.

글자 본은 명판본(明板本)인《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 하고 갑인자와 갑진자를 개주하였는데, 글자는 갑인자나 을해자보다 작은 편이고 갑진자보다는 조금 큰 중간형이다. 본 활자는 중종 대부터 선조 대까지 약 60여 년 동안이나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직전 무렵의 인본이 되면 활자가 마모되고 목활자의 보주가 많아 인쇄상태가 깨끗하지 못한데, 전해 오는 인본도 20여종에 불과하다.

8) 재주(再鑄) 갑인자와 인력자(印曆字)

선조 때 들어 갑인자를 두 번째로 주조한 동활자가 재주 갑인자이다. 본 활자의 재조에 대하여는 선조 6년(1573) 계유(癸酉)와 선조 13년(1580) 경진(庚辰)에 이루어졌다는 두 기록이 있다. 이중 계유자는《선조실록》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유희춘(柳希春)의《미암일기초(眉巖日記草)》에 주조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며, 경진자는《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 나온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 두 기록에 대한 종래의 견해는 계유자만을 재주 갑인자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계유자는 소규모의 갑인자 재주이고 경진자는 대규모의 갑인자 재주라고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선조실록》에 을해자와 경진자로《무경칠서(武經七書)》를 찍었다는 점을 들어 경진자는 재주 갑인자가 될 수 없고 '재주 을해자' 또는 '방을해자체 활자'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에 새로 발굴된 김귀영(金貴榮)의《동원집(東園集)》에 "재주 갑인자는 선조 13년(1580)에 갑인자본《대학연의(大學衍義)》를 글자 본으로 하여 9개월에 걸쳐 주성한 것"이라고 소상히 밝히고 있어 경진자가 재주 갑인자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김귀영은 선조 때 우의정과 판중추부사를 거쳤던 당대의 고관이었다는 점과 이 기록이《광해군일기》와도 일치된다는 점에서 경진자가 재주 갑인자임을 뚜렷하게 입증해 준다. 따라서 재주 갑인자의 주조년 간지에 의한 정식명칭은 '경진자'라 일컬음이 옳다 하겠다.

본 활자는 초조 갑인자에 비하면 주조의 정교도가 떨어져 글자체가 조금 투박하고 글자 획이 운필(運筆)의 형태를 띄고 있어 박력이 없어 보이지만, 이후에 계속해서 주조된 개주(改鑄) 갑인자들보다는 낫게 만들어졌다. 현존하고 있는 본 활자의 인본은 활자 주조 후 얼마 되지 않아 발발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인출 기간이 짧아서 종류와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인쇄 상태가 대체로 깨끗하고 정교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인력자는 관상감(서운관)에서 각종 역서(曆書)를 찍은 활자인데,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기록과 실물이 전해지고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인본 중에서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이 전란의 수습을 지휘하고 명령한 것을 기록한《대통력(大統曆)》을 보면 쇠활자 큰 자와 작은 자로 찍혀 있다. 이를 '인력자' 또는 '관상감(서운관) 철활자'로 일컫고 있다.

인력자가 언제, 누구에 의해 주조되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심수경(沈守慶)의《견한잡록(遣閑雜錄)》에 "항상 주자로 책력을 찍어 반포해 왔는데 임진왜란 때 서울 함락으로 책력 기구가 모두 없어지고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듬해 환도하니 인력주자(印曆鑄字)를 수습하여 바치는 이가 있어 이전과 같이 역서를 찍어 반포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논어언해論語諺解). 조선 선조 21~23년(1588~1590)에 경서자(經書字)의 한문 및 한글활자로 간행되었다. 성암고서박물관 소장
이것은 임진왜란 전부터 이미 금속활자로 책력 등의 각종 역서를 찍었음을 뒷받침해 주는 자료가 되며, 이러한 인본들도 전해오고 있다. 또한, 임진왜란 후 본 활자들을 수습하고 부족한 것은 목활자로 보충하여 찍은 역서들도 역시 현존하고 있다.

본 활자의 재료는 무쇠로 여겨지고 필서체의 큰 자와 작은 자로 이루어졌으며, 주조 솜씨가 비교적 정교한 편이다. 특징 중의 하나는 연주(連鑄)활자가 많이 쓰인 점인데, 자주 쓰이는 날짜, 간지, 절기 등은 두 글자가 하나의 글자처럼 잇따라 주조되어 있다.


(2) 조선 후기(後期)의 금속활자

1) 선조실록자(宣祖實錄字)와 갑인자 보주(補鑄)

임진왜란으로 인해 춘추관 및 전주·충주·성주의 4대 사고에 보관했던 태조부터 명종에 이르는 13대에 걸친 실록들이 전주 사고 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소실됨에 따라 선조 39년 전주 본을 토대로 하여 정본 3건과 초본 1건을 새로 인출하였다. 그런 다음 원본인 전주 사고 본은 강화도 마니산에, 정본 3건은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에, 초본은 오대산의 각 사고에 분장하였다.

왕조실록 복구가 시급히 이뤄져야 했기 때문에 전란 후 교서관에 남아 있던 종전의 금속활자인 갑인자 및 계유자와 을해자 및 경진자의 일부와 전후에 응급 조치로 만든 목활자를 서로 보충해 사용하였는데, 이를 편의상 선조실록자로 부르고 있다.

본 인본들은 종래의 활자 인본들처럼 일정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글자형이나 체제도 매우 조잡한데, 존엄을 요하는 왕조실록을 이러한 활자로써 인출하게 된 것은 전란 후의 사회적 혼란과 물자의 결핍 등으로 인해 어찌할 수 없었던 당시의 여건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이전의 왕조실록 원본과 선조실록자를 사용하여 새로 인출한 실록의 활자체는 매우 다르다. 원본은 정성 들여 쓴 사본(寫本)이거나 왕명에 의해 잘 주조된 을해자 또는 성종실록자로 되어 있지만 선조실록자로 인출한 새 인본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여러 활자가 뒤섞인 선조실록자로 되어있다.

본 활자는 실록을 새로 인출한 이 후에도《광해군일기》,《인조실록》및《선조개수(改修)실록》등의 인쇄에 사용되었으며, 효종 초기까지 50여 년에 걸쳐 각종 공신 녹권을 비롯해《국조보감(國朝寶鑑)》,《무정보감(武定寶鑑)》등 중요한 문적(文籍) 인쇄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이후 부족한 활자는 목활자를 만들어 보충했던 관계로 글자체가 투박하고 손상과 마모가 심하여 인쇄 효과가 떨어지자 종래의 금속활자 인쇄 제도를 복구하고자 광해군 9년(1617)에는 주자도감을 설치하고 세종 때의 갑인자를 활자본으로 하여 다시 주조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주조된 갑인자는 다른 금속활자처럼 단독으로 서책들을 수시로 인출할 수 있는 수준의 대규모 개주가 아니고, 일부 마모되기 쉬운 목활자를 금속활자로 보주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활자의 이름을 따로 붙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에 따라서는 이를 전면 개주로 보아 '삼주(三鑄) 갑인자' 또는 활자가 완성된 해의 간지를 따서 무오자(戊午字)라고 일컫기도 한다.

본 활자는 갑인자를 개주한 것 중 가장 정교도가 떨어지고 글자체가 투박하며 글자 획에 박력이 없어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전란 후의 어려운 사정 속에서 이루어진 개주이기 때문에 그 규모가 작았고 광해군 말기의 실정(失政)으로 서책의 인쇄가 이뤄지지 못한 탓에 전해 오는 인본도 극히 드물다.

2) 효종(孝宗) 및 현종실록자(顯宗實錄字)

효종실록자는 현종 2년(1691)에 인출된《효종실록》에 사용된 활자인데, 선조실록자에 비해 글자체가 단정하여《선조실록》이나《인조실록》보다는 인본의 체제가 훨씬 정돈되어 있다.

이 때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도 60여 년이 지났고 병자호란을 겪은 지도 20여 년이 지나 시국도 상당히 안정되어 문물이 차차 부흥되던 때였다. 따라서 존엄을 요하는 실록의 인쇄에도 체제를 보다 개선하기 위해 활자를 주조하게 된 것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본 실록도 단정한 글자체 활자로만 되어 있지 않고 선조실록자도 상당히 섞여 있으며, 본 활자의 인본은《효종실록》이 외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 이용의 범위가 극히 국한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현종실록자는 숙종 3년(1677)에《현종실록》을 인출하기 위해 본래 낙동계(洛東契)라는 민간 단체가 만들어 사용하던 금속활자 3만5천여 자를 구입하고 새로 주조한 4만여 자를 합한 활자이다. 본 활자는 주조 솜씨가 정교하지는 못하지만 글자체는 단아한 진자체(晉字體)로 되어 있어《현종실록》외에도 조선조 말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실록의 인쇄에도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본 활자는 또한 숙종 초기부터 고종 초기까지 190여 년간에 걸쳐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이중 영조 중기에 이르기까지 70여 년 동안에는 실록 이외에 다른 서책들의 인출에도 널리 사용되었으나, 그 이후부터는 주로 왕조 관련 서적들만 인출하였다.

현재 본 활자의 실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많이 간직되어 있는데, 활자의 뒷면이 움푹하게 파여져 있다. 이는 동(銅)의 절약을 꾀하면서 반건성 또는 불건성의 점착물을 사용하여 판을 짜는 경우 점착물이 그 속에 꽉 차서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한 고안인 것으로 여겨진다.

3) 삼주(三鑄) 갑인자와 한구자(韓構字)

삼주 갑인자는 현종 9년(1688) 병조판서 겸 호조판서였던 김좌명(金左明)이 호조 및 병조의 물자와 인력을 이용하여 임진왜란 이후 처음으로 대규모로 주조한 금속활자로서,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가 주로 왕의 칙명에 의한 것과는 달리 개인의 감독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본 활자의 주조에 관한 기록은《현종개수(改修)실록》에 "교서관의 금속활자가 임진병란에 산실(散失)된 후 다시 개주하지 못하고 목활자로써 책을 인쇄한 까닭에 글자체가 단정하지 못하였는데, 호조판서였던 김좌명이 금속으로 활자를 주조함으로써 공사 문적이 처음으로 단정케 되었다"고 적혀 있으나, 활자의 글자체나 글자 본 또는 주조된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본 활자의 이름은 왕조 실록이나 다른 문헌에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인본의 활자들은 모두 갑인자체를 글자 본으로 하고 있다. 갑인자는 세종 16년(1434)에 처음 주조된 후 선조 6년(1573)에 대규모의 2차 개주가 있었고, 본 활자로 인해 3차 개주가 이루어진 까닭에 본 활자를 '3주(三鑄) 갑인자'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 9년(1617년)의 보주 갑인자를 3주 갑인자로 보는 학자들은 본 활자를 '4주(四鑄) 갑인자' 또는 주조된 해의 간지를 붙여 '무신자(戊申字)'로 부르기도 한다.

원래는 수어청(守禦廳)에서 큰 자 6만6천여 자와 작은 자 4만6천여 자를 만들어 사용했으나 김좌명의 사후에는 교서관으로 이관된 이후 공용 문적(文籍)과 함께 각종 서적을 인출하였다. 본 활자도 재주 갑인자로서는 정교하지는 못하나 광해군 때 보주한 갑인자보다는 글자체와 글자 획이 훨씬 박력 있게 주성 되었으며, 영조 말기까지 90여 년에 걸쳐 사용되어 인본의 종류와 수량은 매우 많다.

이처럼 오랫동안 사용된 까닭에 초기 인본은 매우 깨끗하고 훌륭하지만 시일이 경과하면서 활자가 점차 마모됨에 따라 보주가 계속되었던 까닭에 후기의 인본들은 글자체가 고르지 않고 글자 획도 매우 가늘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목활자가 적지 않게 섞여 있어 인쇄 상태가 조잡한 편이다..

한구자는 삼주 갑인자의 주조를 맡았던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金錫胄)가 숙종 초(1677년경)에 당대의 명필가인 한구(韓構)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필서체 작은 글씨를 바탕으로 하여 사적으로 만든 활자이다. 본 활자에 대해서는《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에 "숙종 초에 김석주가 한구에게 작은 글자를 쓰게 하여 동(銅)으로 활자를 만드니 이것이 소자강목(小字綱目)이다"라고 적혀 있어 주조 배경을 알 수 있게 한다. 따라서 본 활자는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들처럼 왕의 칙명이나 국가 기관인 교서관 등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 개인이 사적으로 만든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석주가 본 활자를 만들게 된 동기는 인서의 필요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동기의 일부는 삼주 갑인자를 주조했던 부친에게서 영향을 받아 인서에 흥미를 느껴 주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본 활자의 초기 인본들은 고급 용지를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판면의 조화나 표지의 도안, 제본의 체제 및 형태 등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매우 보기 좋은 인본들을 펴냈기 때문이다.

본 활자는 김석주가 죽자 한동안 인서에 활용되지 않았으나 호조(戶曹)에서 매수한 후 교서관으로 이관해 영조 초기까지 각종 서적의 인쇄에 사용되었다. 초기의 인본은 대체로 정교하나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활자에 마멸이 생기고 인쇄가 깨끗하지 못하다.

때문에 정조 6년(1782)에 이르러서는 본 활자를 재주 했는데, 이를 '재주 한구자' 또는 만든 해의 간지를 붙여 '임인자(壬寅字)'라고 부르며 내각(內閣)에 두고 사용하였다. 초주 활자를 닮게 잘 만들었으나 그 중에는 재주의 특징을 나타내는 글자가 있어 두 활자의 식별을 가능하게 한다.

재주 한구자는 그후 주자소로 옮겨져 사용되었으나 화재로 모두 소실되자 철종 9년(1858)에는 규장각 관리들에게 명하여 3만 여자의 '삼주 한구자'를 다시 주조하였다. 이 때 개주된 활자는 글자 획에 박력이 없고 만든 솜씨가 거칠며, 활자체도 정연하지 못하여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따라서 본 활자의 실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그 인본은 별로 찾아 볼 수 없다.

4) 교서관(校書館) 인서체자(印書體字)

교서관 인서체자는 명나라 중기경 부터 많이 쓰여 오던 명체(明體)를 모각(模刻)하여 교서관에서 만든 활자로, 일명 '당자(唐字)'라고도 부른다. 명나라 인서체가 최초로 도입된 본 활자의 가장 큰 특징은 종래의 모필체(毛筆體)와는 달리 서구의 프린트식 글자형을 연상시킬 만한 새로운 서체의 면모를 보이고, 재질 또한 종래의 동(銅)과는 달리 철(무쇠)로써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러나 재질이 무쇠인 까닭에 활자 획이 좀 굵고 글자 모양이 가지런하지 못하며, 만든 솜씨 또한 약간 거친 편이다.

본 활자는 주조된 시기와 글자체의 형태에 따라 두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 활자는 숙종 초(1684년 이전)에, 두 번째 활자는 경종 초(1723년 이전)에 주조된 것이다. 따라서, 속종 때 만든 것을 '전기 교서관 인서체자' 또는 '전기 교서관 인서체 철활자'라 하고, 경종 때 만든 것을 '후기 교서관 인서체자' 또는 '후기 교서관 인서체 철활자'라고 한다.

첫 번째 활자는 세로획이 굵고 가로획은 가늘어서 그 차이가 현저하며 인본도 다소 협소하고 조밀한 느낌을 준다. 반면에 두 번째 주조된 활자는 글자체가 정연하고 종횡의 굵은 차이도 심하지 않아 첫 번째 활자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재질이 역시 무쇠인 까닭에 섬세하지 못하고 딱딱한 감을 느끼게 한다.

두 활자가 서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명나라로부터 수입해 온 인본을 글자 본으로 하여 주조하였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첫 번째 활자의 인본은 명나라 중기 경에, 두 번째 활자의 인본은 명나라 후기 경에 많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교서관 인서체자의 인본과 명나라에서 간행된 인본을 비교하면 글자체가 서로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거의 일치되고 있어, 명나라 인본들이 교서관 인서체자의 글자 본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본 활자들이 어느 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한 기록이 없다. 다만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인본의 간행 연대 등으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첫 번째 인서체자는 삼주(三鑄) 갑인자의 글자체가 중·대형이어서 인쇄하는데 불편을 느끼게 되자 중·소형으로 된 인서체자를 교서관에서 주조하게 되었으며, 두 번째 활자는 첫 번째 활자의 미비 점을 보완하여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30여 년간만 사용된 첫 번째 인서체자와는 달리 두 번째 인서체자는 영·정조 대를 거쳐 철종 대에 이르기까지 130여 년 동안이나 계속 사용되었으며, 갑오경장 이듬해(1895)부터 학부가 '학부 인서체자'를 목활자로 만들어 교과서를 찍을 때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두 번째 인서체의 초기 인본은 보충자가 거의 보이지 않아 훌륭하지만 후기로 올수록 보충자가 많이 섞이고 첫 번째 인서체자가 혼용된 것도 있어 통일된 글자체를 보이지 못한 인본들이 많다.

그럼에도 본 활자는 중간 자와 작은 자로 되어 있어 각종 서적의 간행에 편리했던 관계로 그 인본들이 다수 전해오고 있는데, 관부(官府)의 서적뿐만 아니라 사가(私家)의 문집 인쇄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본 활자가 교서관 소유의 관부 활자이면서도 사가 문집의 인쇄에도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5) 임진자(壬辰字)와 정유자(丁酉字)

임진자는 정조가 동궁으로 있던 영조 48년(1772)에 갑인자로 찍은《심경(心經)》과《만병회춘(萬病回春)》을 글자 본으로 하여 주조한 동활자이다. 본 활자의 주조에 관한 기록은《정조실록》에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 관료에게 명하여 갑인자 15만 자를 만들어 예각(藝閣)에 소장하게 하고《경서정문(經書正文)》등을 인쇄하였는데, 본 활자는 갑인자로 인쇄한 심경(心經)을 글자 본으로 하여 만든 것이다"라고 밝혀져 있다.

정유자는 정조 원년(1777)에 평양감사 서명응(徐命膺)에게 명하여 갑인자 15만 자를 더 주조토록 한 동활자이다. 따라서,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춘저에 있을 때 만든 활자가 임진자(壬辰字)이며, 즉위 원년에 또다시 갑인자를 글자 본으로 하여 추가로 만든 것이 정유자(丁酉字)이다. 그러나 정유자는 임진자에 보태지 않고 규장각의 본원인 내각에 따로 두고 사용하였다.

임진자나 정유자 모두가 갑인자를 글자 본으로 하여 거의 같은 시기에 새로 만들어진 활자인 만큼 그 인본을 서로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고, 정조 원년이자 활자 주조가 완성된 해인 정유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두 활자를 합해 '정유자'라고 통칭하고 있다. 그러나, 광해군 때의 갑인자 보주를 또 한차례의 개주로 보는 일부 학자들의 경우 갑인자의 개주 차례에 따라 임진자를 '오주(五鑄) 갑인자', 정유자를 '육주(六鑄) 갑인자'라고도 부른다.

정유자는 정조 원년에 주조된 이후 순종 3년(1909)에 이르기까지 130여 년 동안이나 각종 관서의 문서나 서적들을 인쇄하는데 사용되었지만, 글자형이 다른 활자들보다 비교적 큰 탓에 중·소형인 정리자나 전사자보다는 널리 이용되지 못했다. 그런데, 순종 3년은 한일합방이 되기 바로 전 해이므로 본 활자의 인본이 공용(公用)으로는 조선시대 최후의 인본이라 할 수 있으며, 활자는 현재 국립박물관에 대부분 보존되어 있다.

6) 원종자(元宗字)와 율곡전서자(栗谷全書字)

원종자는 숙종 19년(1693)에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이 쓴 글씨를 바탕으로 하여 주조한 동활자를 말한다. 그리고 국역문을 찍기 위해 한글 활자도 주성 하였는데, 이를 '원종 한글자'라고 일컫고 있다.

본 활자의 인본으로는《맹자대문(孟子大文)》과《맹자언해(孟子諺解)》등이 전해 오고 있는데, 활자의 주조가 정교하여 원종의 예리한 필서체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한글활자도 인서체에서 필서체의 구성으로 바뀌는 특징을 나타낸다. 관련 기록에 의하면 이들 활자의 수량은 원종자는 5594자, 원종 한글자는 4605자이다.

율곡전서자는 영조 25년(1749)에 홍계희(洪啓禧)가 스승인 이재(李縡)가 엮은《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를 인출하기 위해 문하생 및 벗들과 더불어 사사로이 주조한 동활자이다.

본 활자는 홍계희가 충청도 관찰사에 부임하여 서책을 인출하면서 충청감영과 관찰사 직함을 표시했던 관계로 한 때는 감영에서 주조한 활자로 보고 '금영인서체자(錦營印書體字)'라고도 했으며, 홍계희가 주축이 되어 주조하였다 하여 '홍계희자'라고도 불렀다.

그러나, 활자 주조가 관찰사로 부임하기 전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금영인서체자라는 명칭은 옳지 못하며, 스승이 못 다한 일을 문하생과 벗들이 서로 노고와 경비를 함께 하여 이룩한 공로를 특정인 한 사람에게 돌린다는 것도 온당한 일이 아니다. 본 활자의 주성 목적이《율곡선생전서》를 인출하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율곡전서자'로 명칭을 붙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본 활자는《강희자전》의 글씨체를 닮게 쓴 고딕 인서체인데, 생생자와 정리자가 만들어지기 40여 년 전에 이미 중국 서체의 영향을 받은 활자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활자의 재료는 무쇠인 것으로 여겨지며, 개인들이 사적으로 주조했기 때문에 기술이 미숙하여 만든 솜씨가 치졸하며 인본 또한 먹 묻음의 차이가 심하여 인쇄 상태가 매우 나쁘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현재 전해 오는 인본은 매우 드물다.

7) 정리자(整理字)와 철활자(鐵活字)

정리자는 정조 19년(1795)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를 글자 본으로 하여 큰 자 16만 자와 작은 자 14만여 자를 주조된 동활자이다. 원래 생생자는 정조 16년(1792) 청(淸)의《강희자전(康熙字典)》을 글자 본으로 하여 32만여 자를 만든 목활자로 만든 해의 간지를 붙여 '을묘자(乙卯字)'라고도 일컫는다. 이러한 생생자가 각성(刻成)된 이후 3년만에 본 활자를 글자 본으로 삼아 동(銅)으로 다시 주조한 것이 정리자이다.

본 활자는 본래《정리의궤통편(整理儀軌通編)》을 찍기 위해 주조한 데서 그 명칭이 붙여졌으며, 뒤에 이뤄진 개주와 구별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는 '초주 정리자'라고 부르고 있다. 큰 자는 글자체가 넓적하고 글자 획이 굵은 인서체인 것이 특징이며, 작은 자는 오늘날의 인서체와 같이 정교하고 단정하다.

초주 정리자는 정조 18년(1794) 창경궁의 옛 홍문관에 새로 설치한 주자소로 옮겨졌으나 주자소의 화재로 정유자, 한구자 등과 함께 모두 소실되자 철종 9년(1858)에 또다시 큰 자와 작은 자 9만 여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재주 정리자'라고 부른다. 활자 주조의 정교도나 글자 모양이 초주 정리자보다 훨씬 떨어지고 글자 획에 박력이 없다.

그럼에도 다른 활자와 비교해 보면 글자체가 보기 좋고 활자 크기가 적당한 인서체여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관서의 공문 및 서적 인쇄에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고종 20년(1883)에 근대식 납활자가 수입되어 각 부문의 인쇄에 다양하게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 활자는 외국과의 조약서나 갑오개혁 이후의 관보 또는 학부가 편집한 교과서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본 활자는 중·소형자의 인서체로 되어 있어서 근대식 연활자처럼 인쇄에 편리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한편,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인들이 직접 활자를 주조하여 상업적으로 사용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 중에는 활자의 재질을 동이 아닌 철을 사용해 만든 활자가 있다. 이들 철활자는 누가, 언제, 어디서 만들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어 아직 활자명을 정식으로 붙이지 못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리자체 철활자'와 '필서체 철활자'가 있다.

정리자체 철활자는 정조 말기(1798년경)에 민간인이 주조한 것으로 활자 모양이 정리자를 닮았다. 본 활자는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서울과 호남지방 등지에서 문집, 족보, 경서, 한의서, 충의록, 효행록, 각종 전기류 등 각계 각층에서 필요로 하는 책을 찍어 널리 보급하였는데, 그 중에는 인쇄 의뢰자의 요구에 따라 의뢰처의 간인(刊印)을 표시한 것도 볼 수 있다.

필서체 철활자는 순조 초기에 사자원(寫字員)의 서체를 바탕으로 민간인이 주조한 것으로 상업적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본 활자 역시 언제, 누가, 어디서 만들었는지에 대해 기록이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순조 대부터 고종 대에 이르기까지 주로 민간의 문집, 족보 및 일반 서적 인쇄 등에 널리 이용되었다.

본 활자는 그 뒤 관서의 서책 인쇄에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구한말 시대에 이르러 활자를 사 들였거나 세를 내어 쓰다가 나라의 주권을 잃게 되자 총독부로 그대로 인계된 듯 하다. 그것이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오늘날까지 전해 오고 있다.

이들 철활자들은 무엇보다 종전까지의 관서 위주의 인쇄에서 벗어나 민간 인쇄를 촉진시키고 시민 문화와 시민 의식 계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에서 인쇄문화사상 그 의의가 자못 크다.

8) 취진자(聚珍字)와 전사자(全史字)

취진자는 순조 15년(1815)에 간행된 남공철(南公徹)의 저서《금릉거사문집(金陵居士文集)》에서 처음으로 면모를 보인다. 활자의 명칭이 취진자로 정해진 것은 초인본인 문집의 머릿글에 '취진판본(聚珍板本)'이라고 적혀 있는 데서 유래한다. 취진판이라 함은 원래 중국에서 목판본에 대해 활자본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도 취진판은 곧 활자판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본 활자가 주조된 배경이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남공철이 자신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새로 주조하게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글자체는 필서체의 일종으로 명나라에서 인출된《전목재초학집(錢牧齋初學集)》을 글자 본으로 하여 주조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우리 나라에도 많이 수입되어 널리 애독되었고, 글자체는 중국에서도 많이 모각(模刻) 되었기 때문에 활자를 주조할 때 글자체를 쉽게 모각할 수 있었으리라 보여진다.

본 활자는 순조 15년부터 헌종 4년까지 약 24년 동안 사용되었는데, 인본은 관서의 서적에는 보이지 않고 사가(私家) 문집만이 전해 온다. 또한, 인본의 체제나 표지, 장정 등은 거의 대부분이 당본(唐本)을 그대로 모방하였는데, 이는 우리 나라의 인쇄술이 차츰 퇴조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사자는 순조 22년(1822) 청(淸)의 건륭칙판(乾隆勅板)인 21사자(史字)를 글자 본으로 하여 주조한 활자로 인서체의 일종이다. 본 활자의 이름은 남공철의 문집에 적힌 '전사체자(全史體字)'에서 유래하는데, 왕의 칙명에 의해 주조된 것이 아니라 순조의 외삼촌이었던 박종경(朴宗慶)에 의해 만들어진 만큼 왕조실록에는 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 활자는 박종경이 사사로이 만든 인서체 활자라는 점에서 그의 호를 따 '돈암인서체자(敦巖印書體字)'라고 부르기도 한다.

본 활자의 인본은 관부에서 간행된 서적도 일부 있지만 대다수가 개인의 저서와 편찬서를 비롯한 불교서, 도교서 등으로 전해 오고 있다. 이는 본 활자가 개인에 의해 주조되어 사용된 탓도 있지만, 본 활자가 사용된 같은 시기에 왕명으로 주조된 정유자나 정리자가 관부의 서적들을 널리 인출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 활자는 단순히 사가(私家)의 소유로만 그치지 않고 훗날에는 교서관 등 관청의 소유로 돌아갔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활자가 주조된 초기인 순조 대에는 사가의 문집들이 주로 인출되었으나 후기인 고종 때에는 관서의 공용 문서들도 적지 않게 인출되었기 때문이다. 활자의 모양은 근대식 납활자와 같이 균정하고 크기가 적당하며 주조가 정교하여 민간에서 널리 애용되었기 때문에 인본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3) 금속활자의 주조와 인쇄

1) 금속활자의 주조방법

금속활자 인쇄술은 11세기 중엽 송나라 필승(畢昇)이 교니(膠泥)활자로서 활판을 제작한 데서 그 연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활자를 어떻게 제작하였다는 구체적인 방법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금속활자를 주조하여 실제로 사용한 것은 세계에서 고려가 가장 먼저라는 것이 여러 문헌을 통해 이미 공인되어 있고《직지》와 같은 실물도 전해 오고 있지만, 고려의 금속활자 또한 제조 방법 등에 대해서는 전혀 전해 오는 바가 없다. 또한, 금속활자의 주조 방법은 시대에 따라 다르며, 관서와 사찰 그리고 민간인 등의 주조 주체에 따라서도 다르게 각각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 때 중앙 관서에서 금속활자를 주조한 방법에 대한 기록은 조선시대 성종 때 간행된 성현(成俔)의《용재총화( 齋叢話)》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먼저 글자 본을 정하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에게 크고 작은 글씨를 쓰게 하거나, 이미 간행된 책의 글자를 본으로 삼을 경우는 그 책에서 크고 작은 글자체를 가려내고 부족한 글자는 인본의 글자체와 닮게 써서 보충하였다.

그런 다음 바닷물에 일정 기간 담궈 진을 빼 조각하기 쉬운 나무를 어미자 크기에 따라 잘라 각목을 만들고 글자 본을 뒤집어 붙여서 글자를 새긴 후 크기가 일정하도록 정밀하게 손질했다.

암수 두 틀로 구성된 쇠 거푸집에는 갯벌의 해감 모래를 체로 쳐서 고루 다지고 면을 편편하게 한 다음 준비해 둔 어미자를 줄을 맞춰 심고 쇳물이 흘러 들어가는 홈을 만들었다. 거푸집의 암수 두 틀은 서로 달라붙지 않도록 표면에는 숯가루를 고루 뿌려 결합시키고 잘 다진 다음 조심스럽게 분리하고 어미자를 뽑아 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 어미자가 있었던 자리에는 글자 모양의 홈이 생기는데, 여기에 쇳물을 부었다. 쇳물이 응고되어 활자가 완성되면 이를 떼어 내어서 거스러미 등을 제거하는 등 마지막 손질 작업을 거치는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이때 나무에 글자를 새기는 사람을 각자장(刻字匠), 주금(鑄金)을 주성 하는 자는 주장(鑄匠), 만들어진 글자를 분리해 저장하고 지키는 자는 수장(守藏)이라고 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까지 주로 민간에서 사용해 온 금속활자의 주조 방법은《동국후생신록(東國厚生新錄)》에 잘 소개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우선 질그릇 만드는 찰흙을 곱게 빻아서 잘 빚은 것을 네 둘레에 테를 돌린 나무판에 판판하게 깔고 다져 햇볕에 반쯤 말렸다. 글자 본은 필요에 따라 임의로 쓰거나 기존의 인본을 판 위에 덮어 붙이고 각수에게 오목 새김을 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녹인 쇳물을 국자로 떠서 오목 새긴 곳으로 흘러들어 가게 하면 활자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하나씩 떼어내어 줄로 깎고 깨끗하게 다듬어 완성 시켰다. 이 방법으로는 동일한 글자체의 활자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사찰에서 사용했던 전통적인 방법보다는 손쉽고 비교적 가지런한 금속활자를 만들 수 있다.

2) 금속활자의 재료와 형상

조선시대 전기에 만들어진 금속활자의 실물들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는 금속활자를 개주할 때 새로운 주금(鑄金) 재료를 준비하여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용해 오던 활자를 다시 녹여서 개주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금속활자의 원료인 금속들을 적절한 비율로써 배합하기가 어려운 기술적인 문제도 있었겠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귀중한 금속들을 새로 마련해야 되는 경제적 여건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들의 금속 함유량의 비율은 활자의 종류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동(銅)활자라고 불리는 갑인자 계통의 활자나 정리자 등의 주재료는 청동(靑銅)이다.

청동은 냉각하면서 응고될 때 수축이 가장 적으며 견고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용해할 때는 유동성이 크므로 활자를 주조하는 재료로서는 매우 적합하다. 이러한 청동의 속성으로 인해 활자는 글자 모양이 미세한 부분까지도 정교하게 될 수 있다.

이에 반해 교서관 인서체 활자는 철(鐵)활자라고 통용되어 왔는데, 이들 활자의 금속 비율은 철이 80% 이상을 점유하고 있고 다음으로 청동, 비소, 탄소 등의 순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철활자라는 칭호는 금속 함유량의 비율에 중점을 두고 붙여졌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금속활자를 지칭할 때는 금속의 함량 비율에 관계없이 동활자 및 철활자 모두를 통칭하는 경우가 많으며, 당시에도 명확한 구분이 없이 주자(鑄字)라고 불린 경우가 많았다.

이들 금속활자의 형상은 글자본의 서체나 활자의 대소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평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글자형은 대부분 폭보다는 길이가 조금 긴 장방형이고, 글자 획의 부분은 전면이 위로 노출되어 있는 반면 활자의 뒷면은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오목형[凹形]으로 되어 있다. 양측 끝은 또한 활판 위에 고정시키는데 편리하도록 서로 대치되어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금속활자는 주조 과정이나 재료의 배합 및 형상에 이르기까지 금속활자로서 실용에 알맞도록 기술을 완성 시켰다. 글자체의 높낮이를 균일하게 하고 후면의 양쪽 끝을 판면에 고착시킨 다음 활자면에 먹을 골고루 발라서 종이에 인쇄하도록 되어 있다.

3) 금속활자의 인쇄방법

금속활자로 판을 짜서 서책을 인쇄하는 방법에는 고착식과 조립식이 있었다. 초기에는 활자의 크기와 모양이 가지런하지 않고 밀랍과 같은 점착성 물질에 활자를 붙여 인쇄하는 고착식이 사용되다가 점차 조립식으로 발전하였다.

고착식은 네 모퉁이가 고정된 틀의 위아래 변에 계선까지 붙인 인판 틀을 마련하고 바닥에 밀랍을 깐 다음 그 위에 활자를 배열하였다. 이것이 완료되면 열을 가하여 밀랍을 녹이고 위에서 철판 등으로 균일하게 눌러 활자면을 편편하게 하고 이를 식힌 다음에 인쇄를 하였다.

고려시대의 활자인 복(복)자의 뒷면을 보면 타원형으로 파져 있는데, 이는 밀랍을 채워서 굳으면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조선조 초기에 만들어진 계미자도 끝을 송곳처럼 뾰쪽하게 개량하여 밀랍 속에 박아 움직이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갑인자에 이르러서는 활자의 네 면을 반듯하게 하고 인판 틀 또한 편편하고 튼튼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판이 사뭇 크면서도 밀랍을 전혀 쓰지 않고, 활자 사이의 빈 공간을 죽목(竹木)이나 파지 등으로 메우면서 조립식으로 판을 짜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러한 방법은 밀랍을 녹이는 비용을 절감하면서도 인쇄량과 인쇄효과도 훨씬 높이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활자를 보면 뒷면을 둥글게 파서 동(銅)을 절약하는 한편, 밀랍이 꽉 차서 움직이지 않게 하는 고착식이 병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밀랍을 참기름과 같은 반건성유와 피마자 기름과 같은 불건성유를 배합, 굳지 않게 하여 열을 가하지 않고도 활자를 밀착시키는 단계로까지 발전시켰다.

금속활자의 인쇄술은 이처럼 판짜기 방법이 시대에 따라 변천되면서 발전해 왔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관서(官署)의 조립식 판짜기였는데, 이를 중심으로 인쇄 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먼저 동으로 만든 인판 틀을 준비하여 네 변에 둘레를 돌리고 중간에는 판심을 마련하되, 그 사이에 어미(魚尾)와 흑구(黑口) 등과 같이 접지와 제책의 기준이 되는 장식을 넣었으며, 각 줄마다 칸막이를 하는데 필요한 계선을 준비하였다.

인판 틀은 최소한 두 세 개를 마련하였는데, 하나를 인쇄하는 동안 다른 것에는 판을 짜야 했기 때문이다. 인쇄량이 많을 때는 인판 틀을 네댓 개 이상 준비하는 경우도 있었다.

둘째, 인판 틀이 준비되면 원고를 차례로 부르고, 여기에 해당되는 활자를 찾아 원고 위에 벌려 놓은 다음 골라 놓은 활자가 한 장 분량이 되면 판에 올렸다. 이 판 올림을 상판(上版)이라 했는데, 이는 활판인쇄에서의 식자(植字)에 해당된다.

원고를 부르는 자는 창준(唱準)이라 하여 글자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 맡았으며, 원고 위에 활자를 올려놓는 일은 활판인쇄의 문선(文選)에 해당하는 것으로 수장(守藏)이나 택자장(擇字匠)이 맡았다.

셋째, 활자 배열이 끝나면 글자 사이의 공간을 죽목이나 파지로 메워 움직이지 않게 하고 편편하게 고르고 나서 먹솔로 활자면에 먹물을 골고루 칠한 다음에 종이를 놓고 말총이나 헝겊뭉치 등으로 골고루 문지르거나 눌러서 인쇄를 했다.

이때 활자 사이의 공간을 메우고 활자면을 편편하게 하는 사람을 균자장(均字匠)이라 하여 숙련된 기술이 필요했으며, 종이를 활자면 위에 놓고 문질러서 인쇄하는 사람을 인출장(印出匠)이라 하였다.

넷째, 초본이 나오면 오자와 탈자를 비롯해 삐뚤어진 것, 희미한 것, 너무 진한 것 등을 바로 잡고 교정자와 균자장이 서명을 하였다. 이때 인쇄 작업의 감독을 맡은 사람을 감인관(監印官)이라 하여 교서관원(校書館員)이 담당하였다.

본문의 교정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은 문신 중에서 임명된 감교관(監校官)이 맡았다. 교정이 철저하게 이루어지면 서책의 머리에 '교정(校正)'이라는 도장을 찍고 계획한 부수대로 인쇄해 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공전(工典)>에는 금속활자 인쇄에 관계되는 교서관 소속의 장인과 인원수를 규정하였고, 그 뒤에 나온《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는 벌칙까지 마련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감인관, 창준, 수장, 균자장은 한 권에 한 자의 착오가 있으면 30대의 곤장을 맞고, 한 자씩 더 틀릴 때마다 한 등씩 더 벌을 받았다. 인출장은 한 권에 먹이 진하거나 희미한 글자 한 자가 있을 때 30대의 매를 맞고 한 자가 더할 때마다 벌이 한 등을 더했다. 교서관은 다섯 자 이상 틀렸을 때는 파직되었고, 창준 이하의 장인들은 매를 맞은 뒤 50일의 근무 일자를 깎는 벌칙이 적용되었다.

이처럼 금속활자 인쇄에는 엄한 규칙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나라 관서의 활자본에는 오자나 탈자가 거의 없고 인쇄가 정교한 것이 널리 자랑할 만 하다.

4) 금속활자체의 변천

우리 나라의 서체는 삼국시대 때부터 대부분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통일신라 시대의 비문이나 석경(石經) 등도 당의 구양순(歐陽詢)이나 안진경(顔眞卿)의 필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고려에 들어 와서도 초기의 금석문들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나 거의 구양순의 필법을 모방하였으며, 중기 이후에는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이 차츰 유행하였다. 진체(晉體)인 왕희지의 서체는 위부인체(衛夫人體)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왕희지가 위부인의 제자로서 그 필법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 후기에 들어서는 원나라 조송설(趙松雪)의 필법이 전해져 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송설체는 촉체(蜀體)라고 부르며, 고려의 금속활자본인《직지》도 글자 획은 진체보다 굵고 글자체는 폭보다는 길이가 긴 촉체에 가까운 장방형 형태를 띄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초기에는 고려말의 전통을 이어 받아 촉체인 송설체를 많이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서예가로는 안평대군을 비롯하여 박팽년, 정란종, 김인후 등을 들 수 있으며, 이 중 안평대군은 경오자, 정란종은 을유자의 글자 본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배원친명(排元親明) 정책을 표방하던 당시에 있어 원의 대표적 서체인 촉체에만 의존할 수 없었던 까닭에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승문원(承文院) 사자관(寫字官)들의 필체를 진체로 바꾸게 하였다. 이러한 서법(書法)의 전통과 국가의 정책에서 영향을 받아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글자체도 많은 파란을 겪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활자체는 많은 변천의 자취를 보이고 있다.

즉, 구양순체인 계미자나 경자자는 촉체인 경오자와 을해자로 개주 되었으나 얼마 사용되지 못하고 녹여졌고, 정란종이 쓴 을유자도 성종 때 갑진자를 만들 때 다시 녹여지고 말았다.

경오자의 경우 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정권 탈취 과정에서 의견 대립이 심했던 안평대군의 글자체인 관계로 폐기한 것으로 보이며, 을유자는 필체가 단정하지 못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촉체가 원의 전통 서체임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친명 정책과도 관련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반면에 진체에 속한 금속활자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전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진체와 촉체의 겸용인 을해자의 경우는 글자체의 대소가 인쇄에 적합하도록 균형이 잘 짜여 있어서 진체인 갑인자와 함께 오랫동안 이용되었다.

계축자의 경우는 진체에 속하는 활자이면서도 작은 활자가 큰 활자에 비해 너무 왜소해 균형이 잘 맞지 않은 결점이 있었던 까닭에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못했다.

조선 후기에도 금속활자의 글자체는 진체와 촉체가 혼용되었는가 하면, 인서체(印書體)와 행서체(行書體)가 새로 도입되거나 생겨나 사용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실록과 각종 서적들을 찍기 위한 선조실록자는 진체와 촉체를 혼용했으나 전쟁 이후 응급 조치로서 급박하게 만든 관계로 일정한 형태를 띄지 못한 채 조잡성을 보이고 있다.

금속활자는 아니지만 임진왜란 이후 많은 서적을 인출했던 훈련도감자는 조선 초기에 이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촉체로 제작된 것이다. 본 활자체가 임진왜란 이후 다시 등장한 것은 당시 훈련도감에서 활자를 만들던 사람들이 촉체를 선호했던 까닭으로 생각되며, 전후 국력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50여 년 동안이나 계속 사용되었다.

후기에 들어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서구의 활자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명체(明體) 인본들을 글자 본으로 한 교서관 인서체자와 청(淸)의 판본을 글자 본으로 한 인서체 활자의 등장이다. 본 활자들은 종래의 붓으로 쓴 서체들과는 달리 글자 획이 서구식 프린트의 글자형과 비슷하며 글자체가 중소형으로 되어 있어서 인쇄에 매우 적합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행서체의 등장은 오랫동안 사용되어 오던 진체에 대한 염증과 이에 대한 반발 사조(思潮)의 변천으로 짐작된다.

한편,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나타나는 목활자는 대부분 금속활자 인본을 그대로 모각(模刻)한 것들이다. 이는 필명 있는 사람에게 글자 본을 쓰게 하는 것보다는 금속활자의 인본을 모각하는 것이 글자형이나 판면이 고르게 되며 제작과정 또한 용이하여 민간에서 목활자를 제작할 때는 주로 이 방법이 활용되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변천을 거듭해 온 금속활자의 글자체는 목활자 글자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5) 조선시대의 인쇄기관

조선시대 최초의 인쇄기관으로는 서적원(書籍院)을 들 수 있다. 서적원은 원래 고려 마지막 왕인 공양왕 4년(1392), 즉 조선 태조 원년 1월에 금속활자 인쇄를 전담하기 위해 설치했던 기관이다.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즉위한 후 관제를 제정함에 있어 고려말의 모든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는데, 서적원이라는 기관도 고려말의 명칭을 그대로 이어 받은 것이다. 그러나 고려말의 서적원은 금속활자 인쇄를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조선 초의 서적원은 단지 서적을 인쇄 출판하는 기관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동일한 명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장 범위에 있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던 듯 하다.

서적원은 영(令)과 승(丞) 등의 직제 아래 관원을 두고 각종 서적을 인출했는데, 이 중에는 목활자 도서인《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나《개국원종공신록권(開國原從功臣錄卷)》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