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인쇄

1. 해방과 인쇄업계

(1) 해방 직후의 인쇄업계

1945년 8월 15일 우리 나라는 36년간의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해방되어 꿈에도 그리던 광복을 찾았다. 해방은 우리 민족에게 잃어버린 국권을 되찾게 하고 빼앗겼던 말과 글을 다시금 찾을 수 있는 자유 세상을 안겨 주었다.

새로운 세상을 맞아 저마다의 가슴에는 새 조국을 건설하려는 기쁨과 투지가 충만했고, 끊겼던 역사의 물줄기를 다시 잇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의욕이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은 인쇄인들도 일제에 의해 막혔던 민족의 눈과 귀와 입을 열게 하고자 민족문화 재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모든 여건이 미비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새로운 의욕으로 활기차게 소생하기 시작하였다.

인쇄도 일제시대 때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시설과 기술면에서 거의 대부분을 일본인이 주도하는 등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인쇄의 명맥을 어렵사리 유지하여 왔다. 종전을 앞두고는 대부분의 업체가 강제로 폐쇄되기까지 했지만 해방이 되어 누구나 회사를 자유롭게 설립하거나 경영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 능력껏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인쇄업계는 다른 업계와는 달리 글 즉, 활자를 모체로 하는 업종의 특성상 '40년대 들어 일제의 우리 글 말살정책으로 크나큰 어려움을 겪었던 터라 해방 당시 각 인쇄소에는 한글활자가 거의 소멸되고 없었다. 따라서 해방으로 우리글을 되찾게 된 인쇄인들은 남다른 기대를 안고 새 출발을 하게 되었으며, 경향 각지의 인쇄소들은 한글활자를 구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당시는 대부분의 인쇄소들이 전태자모(電胎字母)와 경편자모(輕便字母) 활자를 활판소에서 구입하여 사용하였음에도 전국에 수동 주조기가 겨우 10여대에 불과해 인쇄소들이 한글활자를 완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기쁨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에는 38선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함으로서 민족분단의 비극은 시작되고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으로 사회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미군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 11일에는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으로 임명되고 19일부터는 38도선 이남에서 미군정이 실시되었다. 미군은 상륙한지 불과 1주일만인 9월 16일에 서울 만리동에 위치한 조선인쇄주식회사를 접수하였다. 이것은 적산으로서 미 군정청이 가장 먼저 접수한 인쇄시설이었다.

언론 출판의 기능을 중시한 그들은 군정의 시책을 대중들에게 보다 잘 알리기 위해 대규모의 인쇄시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접수된 조선인쇄는 훗날 정부 직영 공보처 인쇄공장인 대한인쇄공사로 개편되었다가 민간에게 불하되었다.

그 외의 공장들도 모두 미 군정청 광공국 소관으로 관리되어 오다가 1946년 10월 하순경부터 총자산 100만원 이하의 소규모 공장의 불하가 시작되었으나, 여기에는 인쇄공장이 단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적산 귀속 사업체로 남아있던 인쇄소는 서울 30, 경기 4, 강원 1, 충북 3, 충남 4, 전북 9, 전남 5, 경북 13, 경남 15개 업체 등 총 84개 업체였으며, 인쇄관련 업체로는 서울에 제본 2, 공책 제조 2, 경북에 제본 1, 경남에 제본 1, 인쇄재료 1개 업체였다.

이 중에는 미 군정청이 가장 먼저 접수하였던 조선인쇄와 조선서적인쇄, 조선단식인쇄, 대해당인쇄, 선광인쇄, 조선교학도서, 대구인쇄합자회사, 마산합동인쇄 등 규모가 큰 인쇄업체들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 당시 서울에 있었던 주요 일본인 인쇄소로는 조선총독부의 관방(官房)인쇄소 격으로 설립되어 국내 최대의 인쇄소였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를 비롯하여 조선인쇄주식회사, 조선단식인쇄주식회사, 조선행정학회인쇄소, 대해당·동양오프셋인쇄, 합명회사 근택상점(近澤商店)인쇄부, 합자회사 곡강상점(谷岡商店)인쇄부, 대총(大塚)인쇄소 등 다수가 있었다.

또한, 한국인 경영의 인쇄소로는 일제 때부터 책자를 인쇄해 온 오프셋 전문인 보진재인쇄소(金洛勳)와 활판 위주인 중앙인쇄소(朴仁煥), 한성도서주식회사(金鎭浩), 대동인쇄소(盧聖錫) 등이 있었고, 대서용지와 전표 등 사무용품을 주로 생산한 평화당인쇄주식회사(李根澤), 경성인쇄소(林仁亨), 우야인쇄소(禹玉哲), 송강인쇄소(鄭熙山), 대기당인쇄소(金大吉) 등의 활판인쇄소와 오프셋인쇄소인 문화당인쇄소(金琪午)가 있었으며, 지기 관련 인쇄소로는 조일지기공업사(金基勛) 등이 있었다.

이중 평화당인쇄의 이근택 사장은 해방 후 아들 이일수와 훗날 사위가 된 유기정에게 위임하여 평화당인쇄주식회사(李壹秀)와 삼화인쇄주식회사(柳琦諪)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야인쇄소는 훗날 한성인쇄소로 개칭되었으며, 송강인쇄소는 대한인쇄소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동양정판사로 바꾸어서 활판에서 오프셋 인쇄로 전환한 다음 계속 성장하여 동양정판인쇄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또한, 문아당인쇄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대한교과서주식회사가 되었고, 조일지기공업사는 주식회사 삼보인쇄지기공업사와 삼보판지공업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이 밖에도 이 시기에는 조선교학도서회사(崔相潤)와 남양인쇄소(南松鶴), 공동인쇄소(李相五), 경화인쇄소(河興基) 등이 설립되어 사업을 활발하게 하였다.


(2) 인쇄업계의 어려움

해방의 벅찬 감격에 비해 인쇄업계의 현실은 출발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직후의 사회적인 혼란, 기술인력과 원부자재의 부족, 좌우익의 사상적 대립으로 계속된 노동쟁의,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물가 등 정상적인 기업경영을 어렵게 하는 요인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려운 경영여건 속에서도 인쇄업체는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게 되자 국한문 서적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고 통치기구의 개편으로 행정 서식을 비롯한 각종 인쇄물의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 동안 깊숙이 감춰 두었던 한글 자모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고 전국의 인쇄업체들은 밤낮으로 가동해야 될 만큼 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조달할 수 있었던 활자와 인쇄잉크 등 몇몇 인쇄 자재는 품질이 낮은 데다가 공급마저 달렸고, 특히 일제 말엽부터 악화되었던 인쇄용지 난은 폭발적인 수요 팽창으로 더욱 악화되어 인쇄인들은 밀려드는 인쇄물의 주문을 거절해야 할 정도였다.

해방 당시의 인쇄용지는 대소 인쇄소에 약간의 재고가 있을 정도였고 용지의 생산능력은 거의 마비 상태에 있었다. 이 나마의 용지조차 무수히 생겨 난 각종 단체의 정치 및 사상관계 선전물 제작에 충당되다 보니 1946년을 맞기도 전에 재고의 전량이 소모되고 말았다.

당시 국내에는 몇몇 제지공장이 있었으나 일제가 전시에 대비하기 위해 지방으로 소개해 놓았었는데, 이들 제지공장의 생산품은 모두 선화지(仙花紙) 뿐이었으며, 원료난과 자금난으로 제지공업은 부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중 인쇄용지 생산공장은 일제 때부터 가동되었던 군산의 북선제지화학 1개소 뿐이었으며, 이 공장의 생산능력은 월 평균 600톤에 불과하였다. 그나마 해방 후 상당기간 운휴 되었다가 가동하기 시작하였으며, 북한에서의 펄프 공급이 중단되면서 원료 확보마저 어려워 생산된 용지는 대부분 가장 시급했던 교과서용으로만 쓰였다.

그 전까지는 신의주에 있던 왕자제지에서 생산된 인쇄용지의 상당량이 내려왔는데, 1946년 5월 23일을 기해 그 동안 자유로이 내왕하던 38선의 왕래가 금지되자 북한으로부터의 용지 공급이 그치게 되어 인쇄용지 난을 더욱 가중시켰다. 인쇄용지 사정이 심각해지자 마카오 등지에서 밀수입하는 경우도 생겨났으나, 용지의 정식 수입은 보다 시급한 식량문제 등이 산적해 있어 순조롭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인쇄용지 수급문제는 더욱 심각해져 일반도서 출판계와 신문사의 용지난은 극에 달할 정도였다. 미 군정청에서도 인쇄용지 문제가 날로 심각해지자 개입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언론 출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여 모든 인쇄출판을 간단한 등록만으로 인정했던 초창기의 제도를 바꿔 1946년 4월에는 정기 간행물의 발간을 허가제로 변경했고, 7월부터는 신규 간행물 허가를 아예 중지시키고 말았다.

또한 용지난을 직접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불요 불급한 도서의 생산을 억제하기 위하여 용지 배급권을 행사하여 출판계를 정비하고, 1946년 12월에는 수입을 적극 주선하여 국내 용지 생산시설의 확충을 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워낙 극심했던 용지난이라 근본적인 해결을 보지 못했으며, 가장 중요한 교과서용 용지도 태반이 부족해 갱지나 모조지는 물론 선화지까지 섞어 인쇄하는 실정이었다. 인쇄용지 고갈 현상은 마침내 종이의 밀수입을 초래하여 소위 '마카오지'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었고, 정부도 마카오에서 밀수입하는 종이만은 묵인해 주는 형편이었다.

심각한 인쇄용지난을 타개하고자 수입물량을 크게 늘렸는데, 1946년도는 30톤에 불과했던 용지 수입이 1947년에는 15,383톤으로, 1948년에는 16,021톤으로 늘어났다. 이같은 수입물량으로도 인쇄용지의 절대량이 부족하여 인쇄에 적합하지 못한 저질 용지로 책을 만드는 경우가 허다했으며, 이나마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에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전력난이었다. 당시에 남한은 전체 전력 수요량의 42% 정도를 북한의 송전에 의지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1948년 5월 14일을 기해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트집잡아 전면적인 단전을 감행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인쇄소는 전면 휴업상태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 중에는 석유 발동기나 미군의 자동차 엔진 등을 이용하여 임시 변통으로 인쇄기를 돌리기도 하였다.

인쇄업계는 용지난과 전력난 외에도 기술자가 태부족하여 공장을 가동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큰 인쇄사의 경우 기술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큰 인쇄시설은 가동할 수조차 없었다.

여기에다 날로 악화되는 좌우의 대립 또한 인쇄업계도 예외일 수가 없어서 많은 인쇄소들이 종업원의 데모와 파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 직후에는 좌우익의 충돌로 사회 불안이 가중되고 빈번한 노동쟁의로 기업활동이 크게 위축되었는데, 인쇄업계는 시설의 노후와 기술인력의 부족마저 겹쳐 침체현상이 더욱 심하였던 것이다.

인쇄업계의 노조는 1947년에 12개 조합의 1,073명, 1948년에 15개 조합의 1,005명이었는데, 노동쟁의는 1946년에 28건이 발생해 1,280명이 참가했으나 사회가 차츰 안정됨에 따라 1947년에는 7건 발생에 245명의 참가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기술 부족과 시설 노후도 인쇄업계의 발전을 저해하는 크나 큰 요인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조선인쇄와 대해당인쇄 등에서 원색분해가 가능하였으나 해방 후에는 색분해에 사용되는 감광 재료의 수입난에다 기술부족까지 겹쳐 색분해 작업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인쇄 기자재의 수입 또한 자유롭지 못하여 인쇄기계는 극도로 노후되었고 인쇄물의 품질은 더욱 저하되었다.


(3) 인쇄업계의 현황

해방 이후 인쇄업계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서도 업체 수가 해마다 늘어나 전국의 종업원 5명 이상의 인쇄 및 제본 업체는 1946년에 221업체에 종업원 4,540명, 1947년에는 236업체에 4,567명, 1948년에는 228업체에 6,236명이 되었다.

1948년 현재 인쇄 및 제본업체 중 비교적 큰 11개 업체에는 2,303명의 종업원이 종사했으며, 이들 업체의 당해년도 생산액은 16억2,026만원이었다. 이는 업계 전체 생산액의 3.1%에 불과한 것으로 1940년도의 23.1%에 비하면 그 비중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이어서 상대적으로 군소 업체들이 많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1948년 1월 현재 종업원 규모별 인쇄업체 수를 보면 전체 228개 업체 중 5∼9명이 70개, 10∼14명이 68개, 15∼19명이 21개 업체로서 5∼19명의 업체가 전체의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100∼149명이 6개, 150∼199명이 2개, 200∼249명이 2개, 600∼699명이 1개 업체였다.

그러나 인쇄물의 수요가 증가하자 인쇄업체의 수도 크게 늘어나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되던 당시의 국내 인쇄업체 수는 서울의 119개 사를 비롯하여 경기 19, 강원 23, 충북 12, 충남 27, 전북 26, 전남 45, 경북 56, 경남 87, 제주 3개 사 등 총 417개 사였다.

한편, 6·25동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서울의 인쇄시설로는 활판 인쇄기 447대, 오프셋 및 석판 인쇄기 54대, 실링 인쇄기 등 특수 인쇄기 43대가 있었다. 지방에는 오프셋 인쇄기 2대, 석판 인쇄기 10대, 그리고 800여대의 활판 인쇄기가 있었으나 이들 활판 인쇄기는 모두 4·6반절 이하의 소형 인쇄기였다.

이들 시설 외에 인쇄관련 시설로는 서울에 주조기 13대, 그리고 재단기가 서울에 70여대, 지방에 200여대가 있었는데, 국내 인쇄업계는 이들 인쇄시설을 가지고 해방 이후 6·25동란 전까지 운영하여 왔다. 그러나 이러한 인쇄시설들 중에서도 서울에 있었던 시설의 절반 정도는 6·25 동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4) 인쇄단체의 발족

일제 치하에서 관 주도로 조직되었던 인쇄물 공동수주단은 1945년 8월 18일 총 18개 회원사 중 일본인 업체 15개 사 전원과 한국인 회원사 중 보진재인쇄소가 참석해 해산총회를 개최하고 공동 출자금을 환불하는 한편,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이 인수했던 배급물자를 분배하였다. 이로써 일제가 연합군의 폭격을 대비하기 위해 인쇄소를 지방으로 소개시키려고 조직한 공동수주단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한 채 1개월 여만에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모든 기능이 정지된 채 간판만 붙어 있던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은 또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강제로 폐쇄되었던 한국인 경영의 모든 인쇄업체들이 다시 문을 열었으며,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은 한국인 조합원들에 의해 새롭게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던 단체나 기업들을 한국인들이 인계를 받아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인쇄업계에서도 1945년 9월 5일 현재 서울 중구 저동 1가에 위치했던 조합 사무소 2층 강당에서 일본측 대표들로부터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의 사무를 인계 받았다. 인계식에는 한국측 대표로 박인환(朴仁煥) 이사, 노성석(盧聖錫) 감사가 참가하고 일본측 대표로는 고바야시(小林敬治) 이사장과 구로자와(黑澤猪平) 상무이사가 참석하였으며, 조합 서기 이주남(李朱男)이 배석하였다.

조선공업조합령에 의하여 1939년 경성인쇄인동업조합으로 출발하였던 경성인쇄공업조합은 경기도인쇄공업협동조합으로 확대 개편되고 또다시 이 조합을 모체로 하여 조선인쇄연합회가 결성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어 왔지만,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그 막을 내리고 마침내 한국인 조합원에 의해 운영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일제 침략과 함께 우리 나라에 진출하여 인쇄업계를 장악하고 영리를 추구하면서 40여 년 동안이나 주인 행세를 해 오던 일본인 인쇄업자들은 자신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한국 인쇄인들에게 모두 넘겨주게 되었다. 서울을 비롯해 각 지방에 산재하고 있던 수많은 일본인 소유의 인쇄소들도 한국인들에게 소유권을 넘겨줌에 따라 한국인 경영자들이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들로부터 인수받은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은 해방 직후 사회의 혼란 속에서도 인쇄업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일제 때 조선교학도서의 지배인이었던 최상윤(崔相潤)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몇몇 인쇄인들에 의해서 개편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들은 1945년 9월 16일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을 발전적으로 해산시키고 인쇄업계의 질서를 유지시킬 목적으로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를 발족시켰다. 서울 저동의 경기도인쇄공업조합의 사옥을 접수하여 간판을 내건 동 협회는 해방 이후 몇몇 인쇄인들이 뜻을 모아 발족시킨 과도기의 임의단체에 불과했으나 사상 최초로 한국인 인쇄인들 만으로 구성된 인쇄단체였다.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는 한국 인쇄인들의 유일한 조직체로서 경기도인쇄공업조합 소유의 모든 재산과 권리 및 공동이용 사업까지도 인계 받게 되었다. 최상윤을 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정관까지 제정하여 인쇄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면서 황폐화된 인쇄업계의 재건에 힘쓰는 한편, 미 군정청을 상대로 업계의 권익신장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동 협회는 당시의 과도기적인 사회현상으로 조직이 서울시 일원에만 한정되었을 뿐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끝내 전국적 조직으로는 확대되지 못해 그 운영과 사업이 유명무실했으며, 광주, 전주, 군산, 강릉 등 일부 지방에는 인쇄인 단체가 자생적으로 조직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1948년 5월 10일의 총선거로 구성된 제헌국회가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 공포함에 따라 국호가 정식으로 대한민국으로 결정되고, 8월 15일에는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됨으로서 3년간에 걸친 미군정은 종식을 고하게 되었다.

각 기관이나 단체에서는 그 동안 사용하던 '조선'이란 명칭을 '대한' 또는 '한국'으로 개칭하고, 각 임의단체들은 정식 공익단체로서 사단법인의 인가를 관계당국에 신청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조선인쇄문화건설협회도 1948년 8월 11일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며 동 협회를 해산하고 사단법인 대한인쇄협회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 출범하였는데, 이후의 인쇄 단체사는 별도의 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2. 인쇄업계의 시련과 극복

(1) 6·25 동란과 인쇄업계

1) 인쇄업계의 피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38선 전역에 걸쳐 개시된 북한군의 남침으로 야기된 6·25 동란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민족상잔의 비극이었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1천만 이산가족이 생겨났는가 하면 전 국토가 참담한 피해를 입으면서 빈약했던 산업시설마저도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끊임없는 자구노력을 통해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인쇄업계도 여타 업계들과 같이 재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서울에 있는 인쇄시설은 70% 이상이 파괴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동란으로 말미암아 조선서적, 조선인쇄, 대해당, 동양오프셋인쇄 등 큰 업체의 대규모 인쇄시설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은행권을 인쇄했던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는 적군의 위조지폐 발행을 염려한 아군의 맹렬한 폭격에 의해 인쇄시설이 거의 완파되고 말았다.

더구나 전쟁 발발 3일만에 서울이 점령당한 터라 몸만 겨우 피신하고 인쇄시설을 지방으로 옮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적 치하에서 파괴된 인쇄시설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1951년의 1·4 후퇴 때는 사전에 예고가 있었던 터라 어느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각 인쇄소들은 전화(戰禍)를 모면한 인쇄시설들을 안전한 곳에 숨겨 놓거나 땅 속에 묻어두는 방법 등으로 조치를 취한 다음 피난을 떠났다.

또한, 많은 인쇄소들이 전화 속에서도 파손되지 않고 남아 있던 인쇄시설들을 앞다투어 피난지인 대구와 부산 등지로 소개(疏開)시켰다. 그리하여 서울에 있었던 전체 인쇄시설의 3분의 1 정도가 대구와 부산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2) 6·25 동란 중의 인쇄

1·4 후퇴 이후 1953년 서울이 수복되어 피난 갔던 인쇄소들이 서울로 복귀할 때까지 국내 인쇄는 주로 부산과 대구지역에서 현지 인쇄소들과 피난 인쇄소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전체 인쇄물은 활판 인쇄가 80%, 석판 및 오프셋 인쇄가 20% 정도여서 활판 인쇄가 주종을 이루었다.

한가지 특기할만한 사항은 서울에서 피난간 인쇄소들 중 부산에는 활판 인쇄소들이, 대구에는 석판 및 오프셋 인쇄소들이 보다 많이 피난한 점이다. 이는 6·25 동란이 발발하기 전 부산에는 활판 인쇄시설을 갖춘 인쇄소가 적고 오프셋 인쇄소가 많았던 반면 대구에는 활판 인쇄소가 많은데 비해 오프셋 인쇄기는 한 대도 없이 석판 인쇄기만 두어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한 주요 인쇄소로는 보진재인쇄소(金洛勳), 평화당인쇄주식회사(李壹秀), 대한교과서주식회사(金琪午), 협진인쇄공사(金慶洙 外), 남양인쇄소(南松鶴), 홍원상사인쇄부(趙洪元·姜鶴成), 동양정판사(鄭熙山) 등이 있었다.

이중 오프셋 인쇄기 3대를 가지고 피난 온 보진재인쇄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대한인쇄협회의 살림까지 보살폈고, 조판시설만 갖고 나온 평화당인쇄는 주로 월간지를 맡았으며, 대한교과서는 1951년 3월 문교부가 새로운 학제를 실시함에 따라 각급 학교 교과서를 신규 발행하게 되어 피난 인쇄소들 중에서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피난시절 부산에서는 후일 인쇄사에 기록될 만한 인쇄소들이 창업되기도 했다. 이 중에는 서울로 환도하여 훗날 광명인쇄공사로 개칭한 관북인쇄소(李學洙)를 비롯해 협진인쇄소에서 분리 독립한 후 국방부 지정인쇄소가 된 태성사(申鎭鉉), 그리고 민중서관인쇄부(李炳俊), 제일인쇄소(金顯常, 梁漢錫) 등이 새로 설립되었다.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한 인쇄소로는 유엔군 사령부의 인쇄물과 대구 연초 제조창의 담배갑 인쇄를 하여 가장 많은 매출액을 올린 대한단식인쇄주식회사(吳昌根, 金鍾國)를 비롯하여 태양당인쇄소(金榮錫), 서울오프셋인쇄소(金奉男), 동아정판주식회사(朴昌邱), 선광인쇄주식회사(金是達), 성심사(金榮來, 金景來) 등이 있었다.

대구에서도 새로 창립된 인쇄소가 있었는데, 원래 공군인쇄창으로 설립되어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활판시설을 보유했던 선미인쇄소(崔枝洙)와 석판 오프셋 인쇄 전문이었던 청문사(尹泰龍, 趙在均) 등이 대표적이다.

동란은 인쇄업계에 많은 어려움을 주었지만 피난지로 소개시켰던 잔여 인쇄시설 소유업체나 부산, 대구지역의 인쇄업체 그리고 신규 창업된 업체들은 일시적이나마 국한된 시설로 철야작업을 계속해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일거리로 인해 문자 그대로 황금시대를 구가하는 전쟁 특수를 누릴 수 있었다.

한편, 동란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쇄인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인쇄 발전을 위한 방안들을 다각적으로 모색하기도 했다. 피난지인 부산에서는 서울에서 소개한 인쇄인들이 동업자 회의 등을 통해 학제 개편에 따른 교과서 인쇄문제와 전쟁의 피해를 입은 인쇄공장의 복구문제, 인쇄자재 소요량 조사에 관한 사항들을 논의하기도 했다. 이는 전시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인쇄업계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업계 재건을 위한 방안들을 상호 모색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란 중에는 인쇄용지의 수급상황이 원활하지 못하자 각 업체에서 필요로 하는 인쇄용지 소요량을 조사하여 관계당국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의 용지수급은 생산자나 수입자로부터 지업사나 출판사를 거쳐 인쇄소에 공급되고 있었다. 이같은 용지 조달의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국산 용지는 인쇄인들에게 직접 배급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상공부는 관리물량이 부족해 곤란하다는 회신을 보내와 의지를 관철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동란으로 인해 주요한 인쇄시설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인쇄물 생산에 적지 않은 지장을 받자 인쇄기 수입을 위한 정부 보유 달러의 배정신청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마침내 20만 달러를 배정 받아 일본 등지로부터 최신 인쇄시설을 도입하기도 했다.

특히, 대한인쇄협회는 피난지인 부산에 사무실을 설치하고 서울에서 피난 온 인쇄업체와 경상도 지역 인쇄업체들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협회는 각종 모임과 회의를 주선하여 어려움 해소와 발전방안을 모색하고 현안문제의 개선을 관계당국에 진정하는 등 인쇄업계의 대변기관 역할을 했으며, 협회 직할 롤러공장을 설치하고 인쇄롤러를 제조해 인쇄업체에 직접 공급하여 호응을 얻었고, 국내 인쇄기술의 향상을 위해 일본인쇄학회가 발행한 인쇄기술 전문서적을 도입해 공급하기도 했다.

이처럼 6·25 동란은 인쇄업계에도 많은 시련과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인쇄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모두가 힘을 합침으로서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재건의 토대를 이룩하기 위한 노력들이 동란 기간 내내 계속해서 이어졌다.


3) 휴전과 재건 노력

한민족을 크나큰 어려움에 빠뜨렸던 6·25 동란이 휴전되자 각계 각층에서는 부서진 산업시설을 복구하고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려는 재기의 분위기가 팽배했다. 인쇄업계도 피난지에서 서울로 복귀하여 파괴된 인쇄설비를 복구하는 한편 새로운 시설을 도입하는 등 재기에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나, 출판계가 1955년을 고비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한동안 전쟁 특수로 호경기까지 누릴 수 있었던 인쇄업계는 물론 지업이나 제책 등 관련업계 모두를 파탄의 길로 몰아 넣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점차 안정되어가자 출판사가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 1950년에 106개 사이던 출판사가 1955년에는 645개로 늘어나면서 난립 현상까지 보였다. 그러나 전후 복구의 어려움으로 도서 구매력이 급격히 감소되면서 서점들이 연이어 쓰러지고 그 영향이 출판계를 거쳐 인쇄 관련업계에까지 미쳤던 것이다.

불경기는 쉽사리 타개되지 않아 대부분의 인쇄소들이 조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고, 부도를 내고 문을 닫는 인쇄소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인쇄업계는 시설교체와 경영쇄신 등으로 경영난을 개선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이러한 결과 벤톤 조각기를 비롯한 근대식 시설도입이 폭넓게 이루어져 노후시설을 교체해 나갔다.

이 무렵에 수입된 인쇄 기자재의 70% 정도는 일제이고 나머지 30%는 서독 및 유럽 제품이었다. 피난시절부터 1956년까지 도입된 인쇄 기자재는 전국적으로 약 318만 달러 어치였는데, 이중 40% 정도는 관공서 및 공공기관의 시설이었고 60%는 민간 인쇄업체와 제본업체의 기자재였다. 인쇄업체에서 도입한 기자재 중 가장 많이 도입된 것이 활판인쇄 기자재였고, 다음이 컬러인쇄를 위한 오프셋 인쇄기, 동판 인쇄기, 제판시설 등이며, 이밖에 제본 및 특수인쇄 시설도 도입되었다.

광복 후 최초로 외국에서 인쇄기를 도입한 업체는 남양인쇄소로 이 회사는 EAC 원조자금을 지원 받아 일본에서 국전 오프셋 인쇄기 1대를 도입하여 피난지였던 부산에서 가동하였다. 그후 국제보도연맹의 송정훈(宋政勳)이 1953년 광복 후 최초의 서독제 인쇄기인 로랜드 2색 인쇄기와 하이델버그 실린더, 사진제판 시설 등을 도입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해 1956년까지도 가동하지 못했으나, 오히려 보진재인쇄소에서 1956년 10월에 도입한 로랜드 인쇄기를 국내 최초로 가동하였다.

이처럼 6·25 동란 이후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고 재건하기 위해 각 인쇄소마다 시설교체 및 기자재 도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종전의 활판 위주의 인쇄에서 벗어나 점차 오프셋 인쇄의 컬러인쇄를 지향함으로서 인쇄기술 발전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인쇄와 관련된 각 분야에서도 해외 선진기술을 활발히 도입하고 기술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 활판부문에서는 활자가 읽기 좋고 보기 좋도록 개량되고, 지형(紙型)의 제작방법은 습식에서 건식으로 바뀌었으며, 활판인쇄기와 주조기 등은 수동에서 자동으로 그리고 소형에서 대형으로 변하였다. 오프셋 인쇄 부문 또한 다색도화 추세에 따라 종전의 묘판(描版)제판에서 사진제판으로 발전되고, 원색의 인쇄효과를 높이기 위한 동판 인쇄술이 개발되기도 하였다.


(2) 인쇄 기술의 발전

1) 활자개량 작업

국내 활판 인쇄소들은 일제시대는 물론 6·25 동란 이후까지도 활자만을 전문적으로 주조해 판매하는 활판소에서 전태자모나 경편자모로 만드는 재래식 서체의 활자를 사용하였다. 문교부는 재래식 한글활자의 서체개량을 처음으로 시도하여 1950년 2월 가로쓰기용 한글 서체를 현상 모집한 결과 박경서(朴慶緖), 이임풍(李林風), 박정래(朴禎來) 등 세 사람이 응모하였으나 당선작을 결정하지도 못한 채 6·25를 맞고 말았다.

이때 응모한 3인 중 박경서는 일찍이 조선 왕실의 활자조각을 맡았던 사람으로서 납이나 쇠에 활자를 직접 조각하는 명인이었고, 이임풍은 당시 국립도서관의 양서 담당자로 자모의 원도 설계가 전공이었으며, 박정래는 당시 서울신문에서 자모 조각을 맡고 있었다. 이들 모두는 활자체 개발에 남달리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문교부의 교과용 도서 활자체 개량 심의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되어 피난 중에도 활자 개량을 계속 연구하였다.

문교부에서는 1953년 8월 활자체 개량심의위원회가 연구 검토한 최종 안을 채택하여 원도를 작성하기로 결정하고, 그 원도를 유엔한국부흥위원단(UNKRA)에 주어 일본에서 한글 및 한자 자모 4만 여자를 제조해 오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 활자개량 사업은 당초 문교부와 함께 사업비를 부담했던 문교서적(주)과 운크라가 합의하여 문교서적에 별도의 인쇄공장을 건립하기로 합의함으로서 장기간 동안 보류되었다.

그후 문교서적(주)은 국정교과서(주)로 개칭하고 공장 건물을 건축하는 동안 도입기자재의 운용기술 등을 연수받도록 하기 위해 공장장 최장수(崔長秀)와 서체 원도 설계 전문가인 이임풍(李林風), 박정래(朴禎來)를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재일 동포로서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여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장봉선(張鳳仙)을 만나 자모를 일본에서 직접 만들어 오는 것보다는 조각기를 도입하여 원도를 조각하여 쓰는 것이 훨씬 경제적임을 깨닫고는 벤톤 조각기를 구입하였다.

이들은 1954년 4월 귀국하여 이임풍이 디자인하고 박정래가 제도한 자모 원도에 의해 벤톤 조각기로 새로운 한글 활자를 만들었다. 이로써 종전의 호수(號數)활자 대신 벤톤 조각기에 의한 포인트 활자시대를 맞이하게 되면서 우리 나라 인쇄사에 있어 새로운 활자체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여기에서 자극을 받은 각 인쇄소들도 한글 활자체를 앞다투어 개량하게 되었다. 1955년에는 동아출판사가 최정호(崔正浩)가 쓴 새로운 자모 원도로 벤톤활자를 개발하였고, 1956년에는 평화당인쇄(주)가 박정래의 원도로, 삼화인쇄(주)가 최정호의 원도로 각각 활자를 개발하였다. 이 밖에도 대한교과서(주), 민중서관, 홍원상사(주), 광명인쇄공사, 삼성인쇄(주) 등도 활자체를 잇따라서 개량하였다.

그러나 한자의 자모는 새로운 서체의 원도를 개발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일본에서 도입하여 사용했으며, 주조기 또한 일제 만년식 주조기로 교체하였다. 이와 함께 활판 인쇄기도 재래식 소형에서 최신식 대형으로 바뀌고, 지형 또한 습식에서 건식으로 교체되었다.


2) 제판 및 인쇄기술의 발전

1950년대 중반까지 우리 나라의 평판인쇄는 인쇄판을 일일이 손으로 그리는 수공제판(手工製版=描版)이 대부분이었다. 일제 때 도입된 사진제판 기술은 일본인들이 독점하면서 한국인들에게 기술 전수를 의도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복 당시까지도 한국인 사진제판 시설 및 기술자는 거의 없는 실정이었다.

재래식의 수공제판은 원고를 정확하게 재현복사 하는데 정밀도가 낮고 제판과정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지만, 사진제판은 이러한 결점이 없이 보다 선명하고 정밀했으며 작업 또한 신속히 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인쇄기술이 선진국에서는 1950년을 전후하여 비약적인 발전이 이루어져 흑백인쇄에서 다색인쇄로 이행되는 급진적인 추세였음에도 우리 나라에는 '50년대 중반까지도 사진제판 시설이 거의 없었으며, 사진제판 기술을 아는 사람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54년경에 국제문화인쇄주식회사는 <향항(香港)의 밤>이라는 영화 포스터를 사진제판으로 내 놓았다. 오늘날의 인쇄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품질이었지만 당시까지 사용돼 오던 수공제판보다는 월등히 좋은 것이었다. 이것은 일본에서 기술을 습득해 와 훗날 범일사진제판사를 세운 박태근(朴泰根)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당시의 업계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사진제판술을 꾸준히 연구하여 오늘날 대한미술(주)의 모태인 선만사진제판소를 설립한 이태직(李泰稙), 일본인 밑에서 사진제판술을 익혀 정연사를 설립하고 국내 최초로 프로세스 카메라와 150선 스크린 등의 첨단 제판시설을 도입한 김기봉(金基逢) 등 사진제판술 선구자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뒷받침되고 각 인쇄소에서 도입한 일본, 서독제의 최신 제판시설 등으로 인해 '50년대 말경에는 국내 사진제판술도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사진제판술의 발달과 더불어 1956년부터는 동판(銅版)인쇄에 의한 원색인쇄가 개발되어 인쇄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국내 최초의 동판인쇄는 삼화인쇄소를 설립한 유기정(柳琦諪)이 일본에서 기술을 배운 전차훈(全次勳)과 손을 잡고 개발한 것인데, 이 기술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두어 당시의 원색 인쇄계를 휩쓸면서 당사가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삼화인쇄가 동판으로 원색인쇄를 성공시키자 한국문화인쇄(주), 범아원색인쇄사, 대한공론사 등이 뒤를 이었고 1960년을 전후해서는 대한교과서(주), 합동도서주식회사, 대한미술정판사 등 많은 인쇄소들도 동판인쇄 개발에 힘을 기울여 동판인쇄에 의한 국내 원색인쇄 수준도 선진국에 버금갈 만큼 향상되었다.


3) 신기술의 도입

선진국의 인쇄기술을 도입할 목적으로 기술자를 해외에 파견하여 연수시킨 실적은 광복 이후 1961년까지 전체 업계를 총망라하더라도 겨우 수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인쇄업계의 인식과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쇄시설과 기술도입이 국가 성장에 긴요하지 않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외화 사용을 일절 불허한 정부의 방침 때문이었다.

유네스코와 운크라는 1954년에 문교부를 통해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인쇄시설 자금을 원조하면서 시설의 도입선을 일본으로 지정하였다. 따라서 당연히 일본 기술자들이 와서 기계에 대한 운전 및 사용법에 관한 내용을 전수해 주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강경한 반일정책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하자 부득이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어 기술을 연수하게 하였다.

이것이 국내 인쇄기술의 해외연수 시발점인데, 국정교과서(주)는 1954년 일본에 기술자를 파견한 데 이어 1955년에는 미국의 대외 원조 운영기관(ICA) 원조로 공장장 최장수(崔長秀)를 미국에 1년간 인쇄연수를 시켰다. 하지만, 이 때는 실질적인 현장의 인쇄기술의 연수가 아닌 효율적인 인쇄공장의 관리 및 운영기법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국내 최초의 순수 인쇄기술 해외 연수자는 김영기(金永基)이다. 보진재인쇄소 김준기(金駿基) 사장의 친동생이었던 그는 1957년 ICA의 기술 원조금으로 최신 사진제판법을 배우기 위하여 서독에 파견되어 6개월간 연수하고 귀국, 보진재인쇄소의 기술향상 뿐만 아니라 보고회 등을 통해 국내 사진제판 업계에 새로운 지식과 기술 보급에 기여하였다.

한편, 외국의 원조자금이 아닌 업체의 지원이나 개인 부담으로 인쇄기술 습득을 위해 최초로 해외연수를 한 사람은 평화당인쇄(주)의 오회근(吳晦根)이다. 그는 1960년부터 2년간 서독에 가서 최신 사진제판법과 오프셋 인쇄술을 배우고 돌아와 자사의 제판 및 인쇄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해외연수의 성과에 자극을 받은 각 인쇄소에서도 직원들의 해외연수를 앞다투어 시켰는데, 삼화인쇄(주)의 김채홍(金彩鴻)은 서독에서 6개월간 사진제판을 연수받았고, 고려포스터의 이시용(李時容)은 독일인 경영의 홍콩 사진학교를 거쳐 서독에서 3년간 사진제판술을 배우고 귀국했다. 이들은 모두 해외에서 인쇄기술을 연수한 후 귀국하여 자사는 물론 국내 인쇄기술 향상에도 크게 이바지하였다.


(3) 업계 발전을 위한 새로운 시도

1) 인쇄문화 전시회 개최

인쇄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인쇄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한 인쇄문화 전시회가 개최되어 각계 인사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었다. 본 전시회는 인쇄가 문화를 상징하는 것인 만큼 이를 대내외적으로 널리 알리고, 전시회를 통해 인쇄문화의 발전과 질적 향상을 도모하자는 차원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국내 인쇄문화 전시회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제1회 캘린더 전시회는 1955년 2월 15일부터 6일 동안 대한인쇄협회 주최로 서울의 미국 공보원 전시장에서 열렸다. 이 행사에는 20여 인쇄사가 36종의 인쇄물을 출품하였는데, 개관 첫날 3천5백여 명이 참관한 것을 비롯해 매일 2천여 명이 관람하는 등 성황을 이루었다.

각계 인사 7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는 우수 캘린더를 선정해 시상도 하였는데, 대한사진인쇄사와 동아정판인쇄주식회사가 상공부장관상, 합동도서주식회사가 문교부장관상, 남양인쇄사가 공보처장상을 각각 수상했다.

제2회 미술인쇄 및 캘린더 전시회는 1957년 3월 14일부터 10일 동안 미국 공보원 전시장에서 열렸다. 24개 사에서 150개 작품을 출품한 이 전시회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관해 전시기간 중 모두 2만8천여 명이 관람하였다. 이 전시회에서는 특히 전시품에 대해서 관람객들을 대상으로 한 인기 투표가 있었는데, 영예의 1위는 삼화인쇄가 활판으로 제작한 16절 크기의 단색작품인 <할머니>가 차지했다.

1958년에는 종전의 캘린더 전시회를 개칭한 제3회 전국 인쇄문화 전시회가 10월 10일부터 5일 동안 동화백화점(현 신세계) 5층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전국에 있는 34개 인쇄사가 참여하여 다양한 인쇄물을 출품하였으며, 서적, 활자판, 각종 활자 자모, 자모조각 원도, 금속인쇄물, 각종 인쇄기자재 등도 함께 전시되어 종전의 전시회보다 규모나 내용이 훨씬 크고 다양해졌다.

제4회 전국 인쇄문화 전시회는 1959년 11월 19일부터 일 주일동안 화신백화점 3층 화랑에서 열렸는데, 연인원 5만9천여 명이 관람해 대성황을 이뤘다. 20여개 사가 출품한 인쇄물 견본을 비롯하여 사진, 인쇄판재, 롤러, 잉크 등 23종 63점의 자료와 18종 649점의 기자재들이 함께 전시되어 인쇄문화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였다. 특히, 미국 대외 원조기관(USOM)에서는 고속 소형 오프셋 인쇄기와 제판시설을 출품해 전시장에서 직접 인쇄를 실연해 보임으로써 많은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인쇄문화 전시회들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정성 들여 만든 각종 인쇄물의 품질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고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함으로써 인쇄업계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을 제고시키는 한편, 인쇄인들에게도 크나 큰 자신감을 심어 주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2) 국제교류의 시작

인쇄업계는 전란으로 인한 피해를 어느 정도 수습하고 안정을 차츰 되찾아가자 시야를 해외로 넓혀 외국 인쇄업계와의 국제교류를 추진하게 되었다. 인쇄업계 최초의 국제교류는 1957년 10월 10일부터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아시아 인쇄인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한 것인데, 이때 남송학(南松鶴), 이구종(李耉鍾), 신현정(申鉉正), 유기정(柳琦諪) 등 4명이 우리 나라 대표단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개최된 아시아 인쇄인 회의는 일본인쇄공업협회 주최로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개최된 인쇄인들의 국제회의로 각국 인쇄인들 간에 기술 및 정보를 교류하는 한편, 친선강화와 유대증진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최되었다. 우리 나라를 비롯해 일본, 자유중국, 홍콩,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버마, 인도 등 11개국의 인쇄인들이 참가했는데, 국내 인쇄업계로서는 최초로 참가한 국제회의라는 점에서 뜻깊은 행사였다.

또한, 1960년 9월에는 대한인쇄협회에서 최찬윤(崔燦允)을 단장으로 한 9명을 일본인쇄문화전 시찰단으로 파견하였다. 이들 시찰단 일행은 20여일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인쇄문화 전시회를 참관한 것을 비롯해 인쇄기계 메이커, 인쇄재료 업체, 그리고 최신 인쇄시설 등까지 폭넓게 견학하고 귀국하였다.

인쇄인들의 국제교류 활동은 이를 계기로 더욱 활성화됨으로서 인쇄관련 신기술 도입과 기술개발 동향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외국 인쇄업계 인사들과의 유대를 강화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3) 현안문제와 해소 노력

전란 후 재건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인쇄업계에도 어려움이 중첩되기 시작했으나, 이를 해소하려는 인쇄인들의 단합과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공보처에서는 1958년에 인쇄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 직영의 인쇄공장을 설치하여 정부 간행물은 물론 다른 부처에서 소요되는 인쇄물까지도 일괄 생산할 수 있는 방대한 규모의 인쇄시설을 도입할 것이라는 계획이 전해졌다. 인쇄인들은 정부 인쇄공장 설립을 막지 못한다면 전국 인쇄업체가 모두 휴업을 하는 동시에 총궐기하여 반대투쟁을 적극 전개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관계요로에 인쇄공장의 설치 반대 건의서를 제출하는 등 강력히 대응했다.

정부 인쇄공장은 인쇄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힌 데다 애당초 미국 국제협력국(ICA)의 원조자금으로 시설을 도입하여 설립하려던 계획이 원조금의 대폭 삭감으로 차질을 빚자 1960년초에 이르러 취소되고 말았다.

1958년 10월부터는 인쇄단체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인쇄업에 대한 특별행위세 부과 철폐운동을 적극 전개하였다. 특별행위세는 당시 다방, 무도장, 당구장, 골프장 등 유흥업소나 유흥에 유사한 비생산업종에 부과되던 세금이었는데, 인쇄 및 제책업을 이같은 유흥 사치업종과 동일하게 취급해 특별행위세를 부과하고 있었다.

인쇄인들은 특별행위세를 철폐해 줄 것을 여러 차례에 걸쳐 강력히 건의한 결과 내무부는 지방세 조례를 개정해 "특별행위세 종목 중 인쇄 또는 제책 행위에 대해서는 공익상의 견지에서 이를 제외한다"고 밝힘으로서 1960년부터는 비로소 세금 감면의 혜택을 받게 되었다.

한편, 국산잉크의 품질이 나빠 좋은 인쇄물을 생산할 수 없다는 불만이 인쇄인들 사이에서 고조되자 1958년 10월말에는 대한인쇄협회가 중심이 되어 외국산 잉크의 수입을 허가해 줄 것을 관계당국에 진정했다.

상공부 등에 보낸 진정서를 통해 잉크업자들에게 자극을 주고 의욕을 고취시키기 위해 품질이 향상될 때까지 평판용 크로스잉크, 활판용 원색잉크 및 기타 특수잉크에 대하여 조건부로 수량을 제한하여 수입할 수 있도록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문제는 국내 잉크 생산업체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오다가 1960년 1월 23일 대한인쇄협회와 잉크 생산업체를 대표한 한국인쇄잉크공업협회 측이 특수잉크 5톤을 수입하기로 결의를 보았다. 이는 외국산 잉크의 수입을 반대해 오던 잉크 생산업체들도 특수잉크 수입의 타당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이처럼 인쇄인들은 업계에 현안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단체를 중심으로 굳게 뭉쳐서 문제가 해소되거나 요구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많은 성과를 거두고 발전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3. 전환기의 인쇄업계

(1) 인쇄업계의 개황

인쇄업계는 '60년대 들어 경영쇄신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신기술 도입과 최신 시설 증설에 힘씀으로써 기술 및 시설 면에서 일제시대의 잔재물이었던 재래식 인쇄방법의 후진성에서 점차 벗어나 괄목할만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1961년 12월에는 새 정부에 의해 중소기업협동조합법과 중소기업사업조정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2월에는 시행세칙이 마련되어 각 시도 단위로 인쇄공업협동조합 설립이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1962년 3월과 4월에는 서울특별시인쇄공업협동조합을 비롯해 전국에서 각 시도 조합이 설립되고, 4월 23일에는 각 시도 단위조합을 총괄하는 대한인쇄공업협동조합연합회가 발족됨으로서 인쇄 단체는 기존의 대한인쇄공업협회와 함께 이원화되었다.

'60년대 중반부터는 정부의 5개년 경제개발 정책에서 비롯된 공업화 시대를 맞이하면서 인쇄업계의 시설도 날로 현대화되기 시작하였다. 인쇄시설은 재래식의 수동방식에서 자동방식으로 바뀌고 단색에서 다색 인쇄기로 대체되는 등 현대화 추세에 따르는 경영 합리화로 시설과 기술이 모두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을 하게 되어 '60년대 중반부터는 인쇄물 수출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으며, 수출시장 확대를 위한 시장 개척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70년대에 들어서는 두 차례의 석유 파동으로 심각한 원가인상 압박을 받기도 하였지만 원가절감과 경영혁신을 위한 인쇄업계의 시설도입과 기술향상 노력은 부단히 계속되었다. 1978년에는 최신 인쇄시설을 대거 도입함으로써 업계 발전을 위한 디딤돌이 되었으며, 공해문제 해소와 도시 인구의 분산정책으로 존립의 위기마저 겪던 도심의 인쇄소들이 도시형 업종으로 정착되어 업계의 지위 향상을 위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최신시설 도입이 활성화됨에 따라 기술인력이 부족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인쇄기술 분야에서는 기초지식을 갖춰야 하는데도 인쇄교육 이수자들이 대부분 영업관리 등 사무직을 선호하는 한편, 같은 기술직이라 하더라도 보다 나은 작업환경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아져 인쇄기를 다루는 현장인력은 더욱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70년대부터는 정부투자기관, 상조회 등의 비영리 단체들과 신문사, 대기업 등에서 인쇄설비를 신설 또는 확장하여 민간 인쇄영역을 침식함으로서 인쇄업계의 고질적인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인쇄업계는 그러잖아도 영세업체가 난립하고 설비가 확장되어 업체간의 과당경쟁이 날로 심각해지는 실정이었는데, 세제와 금융지원 등에서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 비전문 업체의 등장은 인쇄업계의 경영여건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인쇄업계는 업계의 권익보호를 위해서 단체를 중심으로 굳게 뭉친 후 관계기관 등에 진정 또는 건의하는 한편, 관계법령의 개정을 적극 요구하여 업계 발전을 도모하였다.

'80년대에 와서는 정보 산업시대로 들어서면서 인쇄기술의 향상은 물론 인쇄의 종류가 매우 다양해지고 품질 또한 고급화되면서 인쇄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컴퓨터의 도입으로 인쇄의 개념이 흔들릴 정도로 공정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인쇄물에 대한 기호도 종전의 대량생산보다는 다품종 소량화로 변하였다.

이같은 인쇄물의 수요변동으로 각 인쇄업체는 질적 향상에 주력하게 되면서 국내 인쇄물은 점차 고급화되었으며 인쇄물의 수요량도 급격히 늘어나게 되었다.


(2) 인쇄시설 도입과 기술발전

1) 조판 및 제판시설의 도입

사회 발전과 소득의 증대로 인쇄물의 수요가 점차 단납기와 고품질 등으로 변화되면서 이에 부응하기 위한 각종 인쇄시설들이 선진국으로부터 대거 도입되어 업계 발전을 위한 토대가 되었다.

조판분야에서는 활판조판 방식에서 벗어나 사진식자를 거쳐 컴퓨터 조판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사진식자기는 독일에서 최초로 고안되었으나 이를 실용화시킨 것은 일본이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가 인쇄방식이 활판 인쇄에서 오프셋 인쇄로 전환되면서 일약 획기적인 기술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한글자판 사진식자기가 국내에 처음으로 것은 소개된 국정교과서주식회사가 1954년 12월 일제 사진식자기에 한글 자판을 붙여서 최초로 실용화시킨 재일 동포 장봉선을 통하여 도입하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널리 활용되지 못하다가 1960년에 장봉선이 최정호에게 의뢰하여 작성된 한글 원도를 붙인 사진식자기를 보진재인쇄소에서 도입하면서부터 차츰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국산 사진식자기도 출현할 만큼 발전을 거듭하여 우리 나라의 인쇄가 활판 인쇄에서 오프셋 인쇄로 전환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컴퓨터 사진식자기는 키보드 등 하드웨어만 갖추면 활자나 렌즈가 필요 없이 문자를 신속하게 입력하고 자유로이 편집할 수 있어 오늘날까지도 가장 각광받는 조판기기이다. 이 기기는 1982년 삼화인쇄주식회사와 동아출판사, 금성출판사 등에서 처음으로 도입하여 가동하였는데, 현재는 사진식자기를 완전히 밀어내고 모든 업체에서 널리 활용하고 있다.

제판분야에서는 스캐너의 등장이 주목할 만 한데, 고품질과 다색화가 요구되는 현대의 인쇄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스캐너는 1950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개발된 이래 '6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과 영국, 독일 등에서도 잇따라 개발해 냈다.

스캐너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968년 광명인쇄공사와 삼화인쇄주식회사가 독일제를 도입하면서 부터인데, 처음에는 1도 색분해만 가능하고 확대나 축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널리 활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72년 광명인쇄공사가 2색도가 동시분해 되는 영국제를 도입한 데 이어, 동아출판사와 교학사가 4색도 까지 동시 분해되는 스캐너를 도입함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다.

제판기술은 그후 일반 카메라에 의한 방식에서 벗어나 '80년대 중반까지 컬러 스캐너의 일반화 과정을 거친 다음 토탈 스캐너 시대로 이행되었다. 토탈 스캐너는 초기에는 과다한 투자비용에 비해 생산성이 낮아 일부 업체에만 설치되었으나 '90년대에 들어서는 기능 및 생산성의 향상과 투자비용의 절감으로 경제성이 제고되어 설비 업체가 크게 늘어났다.

인쇄판 또한 '60년대 후반부터는 종전의 아연판 대신 물과 융합이 잘 되어 얼룩지는 일이 적은 데다 많은 통수를 인쇄할 수 있는 알루미늄 판이 등장하였다. 이어서 '70년대 후반부터는 알루미늄 판보다 제판공정이 짧고 다루기가 쉬우며 원고의 재현성 또한 우수한 PS판으로 대체되었다.


2) 인쇄기의 도입

국내 인쇄업계는 '60년대 들어 새로운 인쇄시설의 도입으로 근대화로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부의 경제개발 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경제성장이 이룩되면서 각종 인쇄물의 수요가 급증하고 고품질을 요구하게 됨으로써 종전의 인쇄시설 및 기술로는 수요충족이 어려워져 최신 기술의 도입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60년대 초반까지 국내에 도입된 다색도 인쇄기는 소수에 불과하였고 그나마 대부분이 수동 2색도 오프셋 인쇄기였다. 이는 가격이 워낙 비싸서 민간 인쇄업체에서는 도입할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5년에 삼화인쇄, 평화당인쇄, 보진재, 태양당인쇄, 광명인쇄공사 등에서 서독제와 스위스제 2색 오프셋 인쇄기를 여러 대 도입하여 증설하였고, '67년에는 삼화인쇄에서 국내 최초로 4색 오프셋 인쇄기를 도입하였다.

'70년대에 들어와서는 5·6색도용 오프셋 인쇄기와 8·12색도용 오프셋 윤전기까지 도입되어 선진국 인쇄계에 버금가는 다색도에다 고속화된 인쇄시설을 갖추게 되었으며, 시설의 현대화는 인쇄물 품질의 고급화와 생산성 향상에 많은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특히, 수입 승인품목으로 지정되어 인쇄시설의 현대화에 많은 어려움을 겪던 오프셋 인쇄기가 '77년부터는 수입자유화 됨으로서 인쇄업계는 일본 및 구미지역에서 최신 시설을 대거 도입하여 활판 인쇄에서 오프셋 인쇄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고 시설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80년대 들어 국내 인쇄산업은 인쇄물 품질과 인쇄기술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인쇄물 품질의 고급화와 납기의 단축, 다품종 소량화 등 급격한 변화에 따라 인쇄기술은 물론 인쇄의 종류도 매우 다양해지면서 범위도 크게 확대되었다. 인쇄시설 도입도 매년 늘어나가다 '87년 중고 인쇄기 자율화 조치 이후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인쇄물의 수요가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화로 변화됨에 따라 최첨단 시설을 갖추려는 업계의 노력도 계속되었다.


3) 인쇄기술의 발전

인쇄 및 제판분야에는 '80년대 이후 컴퓨터 기술이 접목되면서 과거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첨단기술과 설비들이 새롭게 생겨나 기술 고도화 시대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설비확충 등으로 공정 개선이나 생산성 향상에 치중하던 종전의 방식에서 벗어나 컴퓨터를 활용하여 공정 전체를 체계화시킴으로서 원가절감과 품질향상을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날로 심각해지는 인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일부 공정에서 무인 자동화 시스템도 등장하고 있으며, 조판과 제판, 인쇄공정에서도 많은 발전이 이뤄져 납기단축과 인쇄물 품질향상에 기여하였다.

이 중에서도 문자조판은 컴퓨터화가 진행되면서 가장 많은 발전을 하였다. 인쇄기 등은 선진국의 기술이나 설비를 그대로 도입해 사용할 수 있지만 조판 부문은 각국의 문자체제가 달라 우리 나라의 경우도 한글 전용의 조판시스템을 독자적으로 연구 개발해야만 했다.

국내에서는 1986년 전산사식 시스템이 개발되어 조판부문이 급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전산사식 시스템은 조판처리가 빠르고 수정작업과 자료보관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개인용 컴퓨터를 입력기로 사용할 수 있어 설비투자 비용도 대폭 절감할 수 있게 되면서 수동 사식업체들이 전산사식으로 전환하였다.

1988년에는 전산사식기 메이커에서 신문의 전면조판 처리까지 가능한 대조용 편집기를 개발하였으며,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사진이나 도표 등도 함께 처리할 수 있는 통합대조편집 시스템까지 개발해 널리 실용화되었다.

제판분야도 일반 카메라에 의한 방식에서 벗어나 '80년대 중반까지 컬러 스캐너의 일반화 과정을 거친 다음 토탈 스캐너 시대로 이행되었다. 또한, 제판공정에 있어서의 토탈 시스템 구성은 전자출판의 발전과 함께 문자 입력과 컬러 스캐닝, 레이아웃, 컬러 수정 등 조판과 제판의 공정을 한 라인으로 통합시켰으며, 앞으로 전개될 화상 송수신 시대를 주도해 나갈 것으로 기대된다.

인쇄분야 또한 품질의 고급화 및 납기단축 등의 수요자의 요구, 생산성 향상과 경제성의 제고 등 주변의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여 고속화 및 대형화되는 동시에 조작이 간편해지는 등 꾸준한 개선이 이뤄져 왔다.

여기에다 인쇄기의 고속화와 작업물량의 소롯트화로 작업변화 횟수가 늘어나 인쇄기의 정지시간과 용지의 손지율이 증가되는 경향이 많아지자 색맞춤 작업의 자동화 체제로 잉크 공급량 자동조절 장치가 개발되었고, 핀트 자동맞춤 장치까지도 일반화되어 대부분의 다색 인쇄기에 표준장비로 장착되었다.

인쇄기의 주변장비도 기능인력난 해소에 기여할 수 있도록 보다 자동화되었는데, 여러 대의 다색 인쇄기에 4원색의 잉크를 동시에 공급하는 잉크 중앙공급장치나 인쇄기 가동 중에 인쇄물을 뽑아보지 않고도 온라인으로 품질을 점검할 수 있는 자동화 장비 등이 개발되어 품질 및 생산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