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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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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의역사 인쇄의 기원
2013-09-05 16: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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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의 기원

1. 문자 발생과 기록

(1) 문자의 발생

오늘날에는 문자가 인간 상호간에 의사전달 수단으로 보편화되어 있지만 문자가 언제부터 생겨나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문자가 생기기 전에도 사람들은 음성이나 몸짓 등으로 의사를 소통시켜 왔다. 그리고 문명이 점차 발달됨에 따라 음성은 일정한 체제를 갖춘 언어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언어는 음성이 전달되는 범위 내에서만 소통이 가능하고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력 범위 내에서만 유지될 뿐이다. 따라서 사회가 점차 발달하고 복잡해지면서 서로 간에 전달하거나 소통시켜야 할 의사의 질과 양이 많아지자 전달성과 보존성이 보다 확실한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생겨나게 된 것이 문자이지만, 문자는 짧은 시일 안에 쉽게 형성되지는 못했다.

문자가 사용되고 기록물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되는데, 인류는 이미 문자가 생겨나기 전인 선사시대에도 의사의 전달과 보존을 위한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고안해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 오래 전부터 가장 널리 사용된 것이 결승의 방법이었다. 천이나 양털로 만든 새끼로 적당한 간격마다 일정한 매듭을 지어 상호 간에 의사 표시를 했던 결승문자(結繩文字)는 고대 중국, 페르시아, 잉카제국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지금도 그 흔적이 페루나 멕시코의 원주민들에게는 남아 있다.

새끼의 개수나 간격에 따라 수(數)를 나타내고 빛깔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나 추상적인 관념까지도 표현했는데, 소유 재산의 기록과 연대기 등을 보존할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커뮤니케이션의 전승성과 보존성을 지닌 문자 이전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승문자는 하나의 약속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뜻을 나타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사전교육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학자들이 인류 문자의 기원을 결승문자에서 찾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서 보다 발달되어 그림문자가 생겨났다. 나무나 돌 등에 선이나 그림을 그려 좀더 편리하고 합리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개발한 것이다. 그림문자는 보다 직접적이면서도 구체적이고 다양성이 있으며, 무엇보다 기록성이 있었다. 이러한 그림문자가 등장함으로서 인류 문화 발달단계에 있어 하나의 전환기가 되었다.

기원전 5천년 경 동굴에서 살았던 원시인들은 동굴 벽면 등에 원과 선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려 기록으로 남겼다. 그림문자는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도 현재 암각화(岩刻畵)의 형태로 여러 곳에 존재하고 있다.

처음에는 언어로만 전해지던 신화나 주변에서 본 것들을 사실적인 그림의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그림이 점차 진화하여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 되었고, 그림 또한 점차 간략화 되어 여러 가지 기호를 사용하는 단계로까지 진보하면서 그림문자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림문자의 의미를 보다 구체화하고 보편성을 갖게 하기 위해 고대 사람들은 상형문자(象形文字)를 고안해 냈다. 이 상형문자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최초의 문자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의 신성문자,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중국의 한자(漢字) 등은 모두 그림문자에서 진화된 상형문자들이다.

상형문자 중 가장 오랜 것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서 사용된 설형문자(楔形文字)이다. 이는 그림문자에서 발달한 것이지만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신성문자와는 다소 달랐다. 이들은 서사 재료로 점토판을 사용했는데, 그림문자를 정교하게 새기기 어렵자 이를 쐐기형[楔形]으로 간소화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기원전 1천년 경에 페니키아 사람들은 이러한 설형문자를 더욱 간소화시켜 오늘날 알파벳의 기원이 되는 문자를 만들어 냈다.

이집트인의 상형문자는 기원전 3천년 경에 생긴 것으로 처음에는 그것이 묘사하는 사실 이상의 것을 표현하지 못했으나 점차 넓은 의미나 개념을 전달하는 수단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집트인들은 이들 문자를 초기에는 돌에 새겼지만 점차 파피루스에 기록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림문자는 점차 발전하여 설형문자나 한자와 같은 상형문자인 표의문자로 진화되었고, 설형문자는 더욱 간소화되면서 발전되어 오늘날의 알파벳과 같은 표음문자로 변천해 왔다.

문자의 발생은 이처럼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되면서 세계 각지에서 필요에 따라 다양한 문자가 생겨났다. 문자가 생겨남으로서 인간은 비로소 거리나 장소에 관계없이 보다 명확하게 의사를 표시하거나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2) 인쇄술 이전의 기록 방식

문자가 발명되어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자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 방식이 필요해졌다. 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록 또한 보다 대량으로 할 수 있는 방법과 오래도록 보존하는 방법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인쇄술이 생겨나게 되었지만, 문자가 오랜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처럼 인쇄술 또한 다양한 방법이 시도되고 많은 시일이 걸린 이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에 기록하고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압인법과 날인법, 탁인법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방법은 인쇄술을 싹트게 하는 근원이 되었을 뿐 진정한 의미의 인쇄술은 7세기경에 발생한 목판 인쇄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압인법(押印法)은 원통(圓筒)이나 인형(印形) 같은 재료에 문자나 그림을 새기고 이를 점토판 위에 굴리거나 눌러서 그 새긴 자국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다. 즉, 나무나 금석 등의 재료를 이용하여 만든 둥근 통에 글자나 기호를 새긴 다음 점토판 위에 올려놓고 압력을 가하면서 굴려 원압식(圓壓式)으로 찍기도 했고, 수정이나 옥돌 등에 새겨 평압식(平壓式)으로 찍어내기도 했다.

이러한 방법은 잉크와 종이 대신에 점토판을 이용하고 있어 원시적이지만 기록과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인쇄와 비슷한 성격을 띄고 있다. 이 방법은 기원전 5천년경부터 주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사용하였는데, 이같은 방식으로 기록을 남기거나 물건의 소유를 밝히는 표시로 삼았고, 왕의 칙령이나 법령을 포고할 때도 사용했다. 또한, 당시에는 천문이나 역서, 의학 등의 학문도 이같은 점토판에 의해 전파됐음을 고려한다면, 오늘날 인쇄의 시원(始原)은 압인법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날염법(捺染法)은 나무나 금속 등의 판에 그림이나 무늬를 새겨 천에 날염하는 방식이다. 점토판이 아닌 천에 압인하는 방식이어서 완전한 인쇄 영역에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압인법보다는 훨씬 진보된 방식이며, 목판 인쇄술을 출현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 방식은 인도에서 처음 시작되어 페르시아와 중국 등으로 전파됐다.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옷감 짜는 기술이 발달했는데, 여러 가지 그림이나 무늬를 나무나 금속의 판에 새긴 다음, 천에 다양한 색채로 날염하는 방식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천에 아름답고 화려한 무늬를 새기는데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불상을 복제하는 등 오늘날의 인쇄 목적에 근사한 행위로까지 사용되었다. 이 방식은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는 천 대신 종이를 사용하였고, 그림이나 무늬 뿐만 아니라 불경과 같은 문자를 찍어내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탁인법(拓印法)은 비석 등에 조각된 문자나 그림을 복사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는 처음부터 복사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서사 재료로 석면(石面)을 이용한 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방법은 동·서양에서 모두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는데,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4천년 경에 조각된 석문(石文)이 나왔으며, 중국에서도 주(周)나라의 유물로 알려진 석고문(石鼓文)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석면에 단순히 글자를 새긴 것에 불과하다.

탁인법의 실제는 중국 후한(後漢)시대 때《5경(五經)》을 석면에 조각하여 탁본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탁본은 글자를 새긴 석면에 종이를 놓고 물을 축여서 붙게 한 다음 부드러운 헝겊 등에 먹물을 묻혀 가볍게 두드려서 찍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인쇄술 이전의 기록 방식은 어디까지나 인쇄술이 생겨나게 한 연원일 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인쇄술의 시초는 아니다. 진정한 의미의 인쇄술은 7세기 경에 생겨난 목판 인쇄에 의해서 비로소 비롯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 본 방법들이 인쇄술을 태동하게 한 온상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2. 서사 재료의 개발

(1) 종이 이전의 서사 재료

1) 동양의 서사 재료

인류가 기록을 위해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은 매우 오래 되었으나 종이를 발명하여 쓰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종이는 중국에서 105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서양에서는 그보다 1천여 년이 지난 12세기 경에야 비로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도 기록을 남기거나 각종 문서 및 책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의 재료를 사용했었다.

중국에서는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서사 재료로 처음에는 거북의 껍질이나 동물의 뼈를 이용하다가 점차 돌이나 옥(玉), 도기 등도 이용했으며, 몽고 민족들은 양피지를 사용하여 불경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양에서 가장 널리 사용된 서사 재료로는 대나무나 나무를 사용했는데, 이를 죽간(竹簡)과 목독(木牘)이라 했다.

하나의 간이나 독에는 일정 분량의 글자만을 쓸 수 있었으므로 긴 문장의 기록은 여러 개의 간이나 목을 가죽끈[韋編]으로 엮어서 하나의 책(策)으로 펴냈다. 즉, 책(策)은 하나의 책(冊)으로 춘추시대에 관한 기록에는 많은 기록은 책을 쓰고 작은 기록은 간독을 썼다고 적혀져 있다.

죽간(竹簡)은 대나무를 불에 구운 다음 잘게 나누어서 만들었다. 불에 구움으로써 대나무에 들어 있는 유성(油性) 성분을 없애 글씨를 쓰기 쉽도록 하고 충해를 방지하여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구실도 했다.

죽간은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다양한 크기가 있었다. 큰 것은 폭이 20㎝, 길이가 60㎝나 되는 것도 있고, 작은 것으로는 폭이 약 1㎝, 길이가 12㎝ 정도의 것도 있다. 같은 크기의 죽간은 세로로 나란히 세운 다음 가로 방향을 비단실로 묶어 책(策)으로 만들었는데, 그 모양은 마치 오늘날의 발과 같았다.

목독(木牘)은 목편(木片)을 말하는 것으로 대개 30㎝ 정도의 정방형이 많지만 다양한 모양도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관청에서 문서를 기록하거나 일반인들이 편지를 쓰는 등 폭넓게 사용되었다. 짧은 문장은 대체로 죽간에 쓰고 긴 문장을 쓸 때는 책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죽간이나 목독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 중국에서는 2천여년 동안이나 보편적으로 사용된 서사 재료였다. 특히 죽간은 질이 견고하고 치밀하며 불에 구워 충해 방지가 가능하였으므로 내구성이 훌륭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료 또한 풍부하여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 이러한 서사 재료에 필사를 하기 위해 처음에는 주로 천연의 나무 즙인 칠을 쓰다가 나중에는 인조 먹을 개발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죽간이나 목독 외에 백(帛)도 서사 재료로 사용되었다. 비단으로 만든 견백(絹帛)은 죽간이나 목독에 비하여 글씨를 쓰기가 쉬우며 열람에도 편리할 뿐만 아니라 길이 또한 임의로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견백에 쓴 글을 백서(帛書)라고 하며, 그림은 백화(帛畵)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원료가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특수 계층에서만 사용되었을 뿐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는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2) 서양의 서사재료

서양에서도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서사 재료가 사용되었다. 원시시대에는 바위나 동굴의 벽, 짐승의 뼈가 사용되기도 했으나 고대에 들어 와서는 점토판이나 파피루스가 사용되었으며, 양피지(羊皮紙)는 동양에서 제지술이 전해지기 전인 12세기 경까지도 널리 사용되었다.


파피루스에 인쇄한 고대 이집트 투탄카멘(Tutankhamen) 왕의 황금마스크.
고대이집트인들은 파피루스를 여러 장 이어서 두루마리로 하여 문서를 기록하였다.


점토판은 고대사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서사 재료 중의 하나로 주로 메소포타미아 지방과 그 주변 지역에서 설형문자를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다. 부드럽고 유연한 진흙을 알맞은 크기와 형태로 빚어서 나무나 뼈, 또는 쇠붙이로 된 철필로 문자를 새긴 다음 불에 굽거나 태양 빛에 말렸다. 글씨를 새기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내용을 첨가해서 기록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진흙이 마르지 않도록 젖은 천으로 싸서 사용하였다.

일반적인 점토판은 직사각형인데 대개 폭이 2∼3인치, 길이가 3∼4인치, 두께가 1인치 정도이다. 그러나, 그 크기와 모양이 매우 다양하여 삼각형, 원형, 원추형의 것도 있으며, 공문서나 법률 기록, 계약, 약속어음 같은 데에도 널리 사용되었다.

하지만, 점토판은 부피가 크고 무거워서 사용하기가 불편하고, 하나의 책은 수십 내지 수백 개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보관과 열람이 매우 불편하였다. 그럼에도 보존성은 매우 특출하여 현존하는 것 중에는 고대 바빌로니아나 앗시리아 지방에서 발굴된 기원전 4천년경의 점토판도 있어 당시의 문헌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파피루스(papyrus)는 식물의 줄기를 잘게 쪼개고 이것을 종횡으로 놓아 끈끈한 액으로 밀착시킨 것으로 그 원료 자체가 부스러지기 쉬워서 보존하는 데는 적당치 못하였다. 파피루스는 원래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늪지대와 삼각주 지역에 많이 자생했던 다년생 식물인데, 현재는 거의 소멸되고 나일강 상류지역 등지에 약간씩 남아 있다.

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겉껍질을 제거하고 속대를 얇게 쪼개어 가로로 나란히 놓고 그 위에 다시 세로로 늘어놓은 후 압력을 가하면 내면의 끈끈한 진으로 인해 접착이 되며, 이를 햇볕에 말린 다음 상아나 조개 등으로 문질러서 광택을 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파피루스는 노르스름한 백색인데, 나중에는 누런 색으로 변하게 된다.

파피루스는 양쪽을 모두 사용할 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잘 접착되어 필기가 가능한 한쪽 면만을 사용했으며, 사용된 갈대의 크기에 따라 종류나 품질이 매우 다양했다. 그 중 품질이 좋은 것은 문서 등을 기록하는데 쓰였고, 질이 낮은 것은 포장지 등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반적인 파피루스는 폭이 9∼11인치, 길이가 5∼9인치인데, 이러한 것을 20개 이어서 만든 두루말이가 표준 규격이었다.

필사하는데 사용된 잉크는 기름의 그을음에 고무 용액을 섞어서 만든 검은 잉크와 빨간 진흙이나 산화철로 만든 빨간 잉크가 사용되었고, 필사 도구로는 끝이 뾰족한 나무 막대기를 연필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처음에는 주로 낱장으로만 쓰이다가 각 장을 연결시켜 두루말이로 만들었는데, 사용하기가 편리하고 기록면도 넓어서 널리 사용되었으나 습기에 매우 약하고 보존성이 낮은 결점이 있었다.

파피루스는 고대 이집트 뿐만 아니라 지중해 연안국가와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로마시대에는 파피루스가 책의 출판 뿐만 아니라 법률이나 외교 문서에도 사용되었고, 양피지나 종이가 사용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인류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양피지는 송아지나 양, 염소의 가죽으로 만든 질기고 부드러운 서사 재료였는데, 기원전 500년경부터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지방은 물론 페르시아와 아시아 지역에서도 널리 사용되었다. 제조 방법은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했는데, 일반적으로 우선 가죽을 씻어 석회로 소독을 하고 나서 털을 깎은 후 무두질을 하면서 가죽을 늘리는 한편 경석으로 광택을 냈다. 이러한 가공 기술은 점차 발달하여 3세기 경의 로마시대에는 자주 빛으로 염색하는 기술이 발달했으며, 4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럽의 서사 재료를 독점하게 되었다.

양피지는 파피루스의 최대 결점인 약한 내구성을 해결해 장기 보존을 가능하게 했지만 값이 비싸고 재료도 한정되었다. 따라서, 수요가 생산보다 많아진 8세기부터는 가격이 점차 오르자 옛날 문서의 내용을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쓴 이중 사본도 성행하였다. 필기도구로는 깃촉 펜이 사용되었다.

유럽에 종이가 전래되기 전까지 가장 보편적인 서사 재료로 쓰인 양피지는 파피루스의 두루말이형에서 현대 도서와 같은 책자본(冊子本 ; codex) 형태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책자본은 양피지를 네모나게 자른 다음 쪽 배열을 한 것인데, 이는 오늘날의 책과 같은 특징을 갖추게 되어 학문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피지 필사본은 4세기 이래 1천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성직자들의 손을 거쳐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 및 유태교의 세계에까지 사상을 널리 전파하거나 보존하는 보편적 수단으로 사용되었으며,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한 이후에도 한동안 책의 제본이나 장식 등에 부분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종이의 발명에 앞서 인류는 보다 나은 서사 재료의 개발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이들 대부분이 보존성이나 필사의 용이성, 경제성 등에서 서사 재료로서의 필요 조건을 충족시켜 주지는 못했다. 이러한 결점을 해소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한 결과가 마침내 획기적인 서사 재료인 종이의 발명을 가능하게 했다.

(2) 종이의 발명과 전파

지금은 책이나 기록물이라면 으레껏 종이를 떠올리게 되지만 인류가 종이를 사용하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랜 일이 아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사용했던 서사 재료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종이의 발명에 앞서 인류가 오랫동안 사용해 오던 서사 재료들은 모두가 서사 재료로서의 필요 충분조건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 것들이어서 인류는 끊임없이 보다 우수한 서사 재료 개발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결과 마침내 획기적인 서사 재료인 종이를 발명하게 된 것이다.

종이는 죽간이나 목독은 물론 점토판이나 금석(金石)보다도 훨씬 가볍다. 또한 비단이나 양피지보다도 값이 싸고 날로 늘어나는 수요에 충당하기도 쉬웠다. 인쇄술은 인류가 종이를 발명함으로써 비로소 싹트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종이는 인쇄술과 더불어 지식의 보급에 일대 변혁을 가져 왔으며, 종교개혁과 문예부흥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후한서(後漢書)≫의 <환관전(宦官傳)〉에 나오는 종이 발명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후한의 원흥(元興) 원년인 105년에 채륜(蔡倫)이 나무껍질과 마(麻), 헌 헝겊, 어망 등을 물에 불려 찧어서 종이를 처음으로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 기계로 나무를 빻고 백토 등을 가하여 망(網)을 통해 펄프 형태로 처리하는 현대식 제지법과 기본적인 원리는 같다.

종이는 당시까지 서사 재료로 사용되던 죽간이나 비단보다 훨씬 우수하여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제지술 또한 빠른 속도로 진보하였다. 초기의 종이는 단순하고 투박한 풀을 먹이지 않은 섬유의 그물에 지나지 않았으나, 기술이 진보하면서 먹을 잘 흡수하도록 종이 표면에 이끼로 만든 아교풀이나 녹말풀을 먹이고 석고를 입혀 희게 한 제품도 나왔다. 이러한 개량은 이미 제지술이 아라비아에 전해지기 전에, 그리고 목판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에 이루어졌다.

제지술은 발명된 이후 약 5백년 후인 593년 고구려 영양왕 때 우리 나라에 전래되어 활용되었으며, 신라 진흥왕 때부터는 국사를 기록하는 데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리고, 일본에는 고구려의 승려인 담징에 의해 610년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서양에는 그보다 훨씬 뒤인 12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제지술이 전파되었다. 당나라와 사라센 제국이 중앙 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을 놓고 패권을 다투었을 때 포로로 잡혀간 중국인 제지 기술자에 의해 757년 사마르칸트에 처음으로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제지술은 12세기경 무어인에게 전파되어 당시 그들이 정복하고 있던 스페인에 전해짐으로서 유럽 지역에도 처음으로 제지공장이 생겨났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이나 영국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인쇄술은 종이가 발명된 이후에야 생겨나게 되었음을 감안한다면, 종이는 인류 문화 발전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셈이다.

3. 인쇄술의 발명

(1) 인쇄술 발명의 의의

인쇄술이 발명되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져 온 필사본 시대에서 마침내 간본(刊本) 시대로 전환되었다는 것을 뜻하며, 이 사실은 인류 문화사에 있어 커다란 의미를 갖는다.

인쇄술의 등장으로 책을 만드는 일이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쉬워졌으며 대량 생산이 가능하여 보다 싼값으로 책을 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일부 계층에만 국한되었던 교육과 지식의 보급이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사회 전반에 걸쳐 변혁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인쇄술의 보급은 서구 사회에 있어 정치적으로는 절대 왕권사회가 근대 시민사회로 바뀌는 원동력이 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성서의 보급을 확대시켜 마침내 종교개혁까지 가능하게 했으며, 사회적으로는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인쇄의 5백년》이라는 책을 저술한 스타인버그(Steinberg, S. H.)는 인쇄술로 인해 사회 전반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전제하면서, "정치·법률·교회 그리고 경제에 관한 일들과 사회학적·철학적·문학적인 운동도 인쇄술이 끼친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하게 이해할 수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처럼 인쇄술은 교육의 보급과 종교개혁 나아가서는 문예부흥의 길을 열게 하였으며, 근대사회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변혁들은 모두가 정신문화를 수용해서 메시지화 하고 널리 보급시킬 수 있었던 인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인쇄물을 통해 사상이나 이념을 널리 전파할 수 있었고, 기존의 문화를 보존하고 전승시킴으로서 지식과 정보를 확대, 재생산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쇄술은 또한 언어나 지적 개념의 표준화를 가능하게 했다. 유럽에서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는 수도원이나 대학에서 사용하는 책은 모두 손으로 써서 만든 필사본이었다. 필사본은 오랜 기간 되풀이되면서 베껴지는 사이에 잘못 표기되는 경우도 있었고 지역이나 저자에 따라 용어의 개념이 달리 전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인쇄술의 발명으로 인해 법률과 언어와 지적 구성 개념이 규격화되고 표준화 된 서적들이 대량으로 보급될 수 있게 됨에 따라 학문과 인식의 방법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인쇄술의 등장은 책을 제작하기 위한 노동 시간의 감소와 생산비를 크게 절감시켰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당시만 해도 파리에만 4천여 명의 필사생(筆寫生)이 있었는데, 인쇄술의 등장으로 직업을 잃게 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새로운 기술에 대해 갖가지 방해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17세기 유럽의 인쇄사. 필사에 의해 전해오던 기록들이 15세기 중엽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발명으로 인해 새로운 활자인쇄 문명이 각국에 확산되었다.


인쇄술은 또한 새로운 작업 구조와 작업장을 출현시켰다. 유럽에서 초기의 인쇄를 할 때는 성직자나 수도사가 직접 편집이나 교정을 맡아 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대학 교수들도 이같은 일을 함으로서 금속을 다루는 장인이나 기계공들과 접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는 여러 가지 지식과 기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보다 밀접한 접촉을 가져 왔고 서로 다른 문화의 교류를 촉진하는 재조직화가 가능케 됨으로서, 지적 노동의 경계가 제거되고 두뇌와 손재주가 결합한 새로운 방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인쇄술은 출현 이후 처음에는 기존의 방식들과 상충되면서 적지 않은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많은 시간과 인력을 대체할 수 있고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신기술로 인식되어 널리 보급됨으로서 사회 전반에 거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2) 목판 인쇄의 출현

인쇄술 이전의 원시적인 복제 방법이 차차 발전하여 인쇄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목판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석비(石碑)가 일종의 판재 역할을 했지만 나중에는 가볍고 조각하기 편한 목재를 판재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동양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쇄술의 시초를 목판 인쇄에서 찾고 있으며, 활판 인쇄는 후세에 나타난 부산물로 여기고 있다. 반면에 유럽에서는 인쇄술이 발명된 연대를 활판 인쇄술이 시작된 해로 보고 목판 인쇄는 인쇄술이 발달하게 된 예비 단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알파벳을 사용하는 유럽 언어와 표의문자를 사용하는 중국의 한자 차이에서 생겨난 것이다.

목판 인쇄술의 발명은 곧 인쇄술의 발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목판 인쇄를 언제부터 누가 시작했다고 단언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연원을 밝혀 줄 결정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목판 인쇄의 발생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인쇄 분야의 역사를 연구한 세계의 석학들은 인쇄술의 발상지가 중국이었다는 것만은 모두가 인정한다. 이러한 이유는 중국이 당시에 인쇄술을 발명할 만한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첫째, 금석문이나 비석에 먹을 묻혀 탁본하거나 찍어내는 일이 일찍부터 성행했다. 이 방법은 비면(碑面)에 닿지 않은 종이의 표면에 먹을 칠하므로 글씨들이 똑같이 나타나긴 하지만,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는 점에서 양각 방식인 목판 인쇄와는 구분되는 방식이다.

또한, 인도에서 발생한 불상을 비단에다 찍어 날염하는 방식이 불교와 함께 중국으로 전해진 7세기 경부터는 목판에다 불상이나 부적을 새기고 먹칠을 하여 종이를 덮어씌운 다음 부드러운 면포로 문질러 찍어내는 방법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비석의 탁본이나 불상을 찍어내는 방법이 목판 인쇄술 출현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보탬이 되었으리라는 점이다.

둘째, 한(漢)나라 때부터 인장이 널리 보급되어 관(官)이나 민간인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인장의 재료로는 석재나 목재는 물론 금속이나 상아 등도 쓰였다. 인장을 새기는 기술은 5세기에 이르러 획기적인 발전을 했다.

당시까지의 인장은 비석에 글을 새기는 것처럼 음각(陰刻)으로 새겼으나 누군가가 문자를 부각하는 방법, 즉 양각(陽刻)하는 방식을 고안해 냈다. 이것은 인주를 찍어 날인하면 글씨는 붉은 색이고 바탕은 하얀 색이 된다. 더욱이 문자를 반대로 부각하면 글자는 바르게 찍힌다. 이는 목판 인쇄술의 핵심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印)이라는 문자는 오늘날에도 역시 인장을 의미하기도 하고, 광의로는 인쇄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 아닐 수 없다.

목판 인쇄술은 이처럼 비석의 탁본이나 날염한 비단, 인장 등의 몇 가지 방법과 과정을 거쳐 출현하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보다 발전되고 널리 보급되었음이 여러 문헌의 기록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3) 조판(雕板) 기술의 발전

오랜 과정을 거쳐 출현된 목판 인쇄술은 보다 쉽게 판각하고 인쇄하는 방법으로 날로 발전하였다. 판목에 글씨를 새기는 조판 기술은 점차 치밀하고 섬세해졌으며, 한 획을 조각하는데도 온갖 심혈과 정성을 기울이게 되었다.

원판이 되는 판재를 다루는 방법도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발전하였다. 판재로는 강도가 높은 대추나무나 배나무 등을 사용하여 적당한 두께로 켠 다음 일단 소금물에 절이고 다시 쪄서 말린 다음 판각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판재는 몇 백년이 지나도 좀이 슬거나 썩지 않았다.

판재는 매끈하게 대패질하여 표면에다 풀이나 아교풀을 문질러 발라서 매끄러운 동시에 부드럽게 만들어 글자를 새기기 쉽도록 준비했다. 그런 다음 서사자(書寫者)가 얇고 투명한 종이에 정교하게 쓴 것을 목각수에게 전해주면 목판의 풀이 아직 젖어 있을 때 필사한 종이를 뒤집어서 종이에 붙이고 나서 먹이 묻지 않은 부분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깎아 내 문자가 양각되게 하였다.

인쇄는 판각된 목판 위에 먹을 바르고 종이를 놓은 다음 부드러운 헝겊이나 솔로 가볍게 문질러서 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한 사람이 하루에 1천장까지 인쇄할 수 있었다. 때로는 분담하여 한 사람은 목판에 먹을 바르고 다른 사람은 솔로 쓸어 인쇄함으로써 인쇄량을 배가시킬 수 있었다.

인쇄물은 종이가 얇고 투명한 탓에 한쪽 면에만 인쇄하였으며, 인쇄된 종이는 인쇄가 안된 한쪽 면을 안으로 하여 접었다. 따라서 접힌 부분은 책의 바깥쪽 가장자리가 되고 다른 한쪽은 묶어서 제본을 했다.

목판 인쇄술이 출현한 처음에는 판본에다 글씨만 새겼으나 점차 글씨 외에도 그림을 새긴 것도 나타났다. 또한 흑구(黑口)와 어미(魚尾)를 새긴 것도 나타났는데, 이러한 것들은 각판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 주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목판 인쇄술이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지만, 활판 인쇄술이 나타나기 전에도 목판 인쇄술은 글씨보다는 판화 제작 등에 주로 이용하였다. 손으로 그린 삽화를 복제가 용이한 목판 방식을 이용함으로써 보다 널리 보급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목판 인쇄술은 활판 인쇄술이 출현한 이후에도 책에 삽입되는 그림이나 삽화 등의 제작에 널리 이용됨으로써 한동안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용되었다.

각판(刻板)의 주체 또한 처음에는 주로 관에서 만든 관판 위주였으나 점차 민간인이 만든 사가판(私家板)이나 사찰에서 만든 사찰판 등으로 확대되었고 나중에는 판매를 목적으로 한 방각판(坊刻板)까지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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