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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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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의역사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인쇄
2013-09-05 16: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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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인쇄

1. 인쇄술 이전의 기록

(1) 사경(寫經)의 활용

우리 나라에서 인쇄술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기원전 3∼4세기 경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교류가 점차 빈번해지면서 각종 서사 재료에 기록하는 방식과 서책들이 전해져 오고, 이러한 것들이 점차 발전하여 인쇄술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에 널리 보급되었던 기록 방식으로는 손으로 일일이 베껴 쓴 필사 방식을 꼽을 수 있다. 필사 방식은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에 불교 경전을 베껴 쓴 사경(寫經)으로 구체화되어 널리 활용되었으며, 그 유물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오고 있다.

불교 초기에 있어서는 사경으로 공덕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는 승려나 일반인을 막론하고 불경을 서사(書寫)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납탑(納塔) 공양하면 모두가 부처와 다름없는 경지에 이르며, 부처의 보호와 위력으로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수복(壽福)함은 물론 소원 성취 할 수 있다는 불설(佛說)에서 근거한 것이다.

사경을 납탑하는 행사에는 여러 불경이 사용되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다라니경이 주된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사경을 납탑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사경 공덕은 정성껏 서사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때 불교가 전래되어 온 이후 왕실의 적극적인 뒷받침으로 사찰이 곳곳에 세워지고 승려들이 중국은 물론 인도에까지 유학하는 등 불교 문화가 꽃을 피우자 불경 또한 수요가 크게 확대됐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사경은 널리 사용되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신라시대의 사경으로는 백지에 먹으로 쓴《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있다. 여기에는 사경하게 된 동기 및 방법, 의식과 절차, 그리고 여기에 관여한 사람들의 관등과 신분도 적혀 있다. 사용된 종이는 얇게 뜬 닥종이로 그 질이 흠잡을 곳이 없어 신라시대 때 발달했던 제지술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이처럼 납탑공양에 소요되는 사경과 불교의 번성에 따라 늘어나는 불경의 수요를 일일이 베껴 쓰는 사서로는 충족시킬 수 없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보다 간편한 방법으로 특정의 다라니경을 다량으로 찍어내기 위한 기술, 즉 인쇄술의 출현을 자극하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된다.

(2) 금석문의 출현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세계의 각지에서는 다양한 기록 방식이 있었음을 앞에서 살펴 본 바 있는데, 우리 민족도 인쇄술의 발상(發祥)에 앞서 이미 다양한 방식을 통해 기록을 남겼으며, 이들 방식들이 발전하여 인쇄술 출현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법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금석류(金石類) 등의 표면에 문자나 그림을 새기고 이를 탁인(拓印)해 내는 방법인데, 이는 보다 발전하여 목판에 글자의 획을 반대로 새겨서 대량으로 인쇄해 내는 방법과 기술을 낳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반도에 세워진 최초의 석각비(石刻碑)로는 기원전 85년경으로 추정되는 평남 용강군의 점제현 신사비가 있다. 그 뒤 414년에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국내성(國內城)에 광개토왕비가 세워졌으며, 신라 진흥왕 때에는 4개의 순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또한, 경북 영일에서 발견된 석비는 개인의 재산 소유 현황과 사후의 재산 상속을 확인해 주는 기록이 새겨져 있는데, 신라 눌지왕 27년(443)의 것으로 추정되어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석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각 뿐만 아니라 금속으로 된 기물에도 문자가 새겨지거나 주성(鑄成) 되었다. 경주에서 출토된 청동 함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위업을 기리는 명문(銘文)이 양주(陽鑄)되어 있는데, 이러한 주조를 위해서는 글자를 새긴 주형(鑄型)을 만들어야 했음을 감안한다면, 그 당시 벌써 이러한 기술이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때 고분 축조용으로 만든 벽돌에도 문자가 음각되어 있고, 경남 의령에서 출토된 6세기 경의 금동여래입상에도 명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목판인쇄술이 시작되기 이전의 것들이다.

이러한 기술은 석판에 장문의 불경을 정각(精刻)하는 단계로 발전하였다. 삼국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융성해지자 석판에다 불경을 조각하거나 이를 탁본하여 사용하는 방법도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로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화엄경(華嚴經)》을 돌에 새겨 화엄사에 소장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본 경의 깨어진 석편들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석판 불경은 목판 인쇄술이 출현되고 나서도 한동안 성행했다. 경주에서 발견된 석각(石刻) 법화경이나 석각 금강반야바라밀경 등은 목판 인쇄술이 출현하고 난 이후인 신라 말기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판 불경은 그 경문(經文)이 석면에 음각되어 있어 탁본으로 만들어 읽을 수 있으며, 인쇄물처럼 오래 보존하고 휴대할 수도 있어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서책의 대용으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각의 방법과 기술은 급기야 금동판에 장문을 음각하는 기술로까지 발전했다. 신라의 금동판은 경문왕 12년(872)에 황룡사 9층 목탑을 중창할 때 탑지(塔誌)로서 새겨 넣은 것으로 가로 세로 각 30㎝의 사각형 판에 탑이 창건된 유래와 만든 사람들의 수와 이름, 착공하여 완성할 때까지의 연월일, 사리 장치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그 전까지의 금속에 나타나고 있는 단순한 명문과는 달리 금동 사리함의 3면 내외판에 긴 문장을 음각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들은 서책을 만들기 위한 인쇄의 조판과는 다르지만, 이것들이 점점 더 발전되어 목각판의 탄생을 보게 되었고 나아가 목판 인쇄술의 출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3) 서사 재료의 활용

우리 나라는 중국에서 개발된 제지법이 전래된 이후 특산 재료인 닥나무나 마(麻) 등을 활용해 일찍부터 품질 좋은 한지(韓紙)를 생산했다.

그 중에서도 닥종이[楮紙]는 희고 두텁고 질겨서 오래 견딜 수 있음이 가장 큰 장점이었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계림지(鷄林紙), 백추지(白 紙)라고 일컬으면서 품질을 칭송했다. 백추지란 명칭은 결백(潔白)하고 질긴 백면지(白面紙)라는 특징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닥나무 껍질을 물에 불려 찧고 표백하여 점즙(粘汁)을 섞은 다음 치밀한 망으로 떠내어 말려서 만들었는데, 장지(壯紙)와 같은 고급품은 특히 두껍게 뜨고 풀까지 먹여 가공했으므로 빳빳하고 윤기가 나며 한결 질겨서 오랜 보존에도 능히 견딜 수 있었다.

먹[墨] 또한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부터 생산하여 널리 활용했다. 삼국시대에 이미 먹이 생산되었으며, 중국에까지 수출되었음이 옛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 나라의 먹에는 송연먹(松煙墨)과 유연먹(油煙墨)이 있었다. 송연먹은 소나무를 태워 생긴 그을음과 아교, 물을 배합하여 제조하였고, 유연먹은 콩, 유채, 동백기름 등을 태워 생긴 그을음을 주원료로 하여 만들었으며, 이를 참먹이라고도 했다. 초기에는 주로 송연먹이 생산되다가 유연먹도 나왔는데, 유연먹은 필사하는 경우는 좋으나 책을 인쇄해 내는 데는 번지고 희미하여 송연먹만 못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처럼 우리 나라에는 인쇄술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미 품질이 좋은 종이와 먹을 생산하여 국내의 대량 수요를 충당함은 물론 중국에까지 수출도 했다. 인쇄에 필수적인 먹과 종이가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 초기의 인쇄 지식과 기술을 얻자 우리 나라에서도 이내 인쇄술이 싹트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2. 백제의 불경 간행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인쇄를 했다는 기록은 백제 성왕 4년(526)에 불경을 간행했다는 설(說)에서 찾을 수 있다.

이능화(李能和)는 그의 저서《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백제 불교의 종파(宗派)》에서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의 사적기를 인용해 "백제 성왕 4년에 법사 겸익(謙益)이 인도에 유학하여 범문(梵文)을 배우고 율부(律部)를 깊이 연구하고서 범승(梵僧)과 함께 율문(律文)을 가지고 본국에 돌아와 국내의 명석(名釋) 28명과 함께 율부 72권을 역출(譯出)하고, 곧이어 법사의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여 왕에게 헌(獻)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미륵불광사의 소재를 확인할 수 없고 사적기의 출전도 밝혀지고 있지 않아 정확한 고증을 할 수 없다. 더욱이 사찰들의 사적기 중에는 자기 사찰의 기적이나 전통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은 점을 감안한다면,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백제 성왕 대는 중국의 남조(南朝)시대에 해당되는데, 이 때는 중국에서도 인쇄술이 행해졌다는 문헌이 확실하지 않다. 이런 점에서 미륵불광사의 사적기는 그 신뢰성에 의문이 가는 점이 없지 않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인쇄술이 백제 성왕 4년(526)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문헌적 근거가 미약하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자료들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만큼, 이 분야에 대한 고증적 자료를 보완하는 데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3. 통일신라시대의 인쇄

(1)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 내용과 특징

신라의 목판 인쇄물 중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것은 1966년 10월 13일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수리하던 중 탑신부에 안치된 사리함 속에서 발견된《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불국사 석가탑에 봉인되어 있었는데,1966년 석가탑을 보수할 때 발견되었다.

이것은 동양의 각 사찰에서 불인(佛印)이나 사경을 소량씩 만들어 탑에 봉안했던 불교 행사에서, 다라니경과 같은 짤막한 불경을 수요에 따라 다량으로 찍어 납탑공양(納塔供養)하는 방식으로 옮아가는 단계의 초기에 만들어진 소형 목판 인쇄물에 속한다.

발견 당시 외부층은 습기로 인해 부식되고 심한 산화로 부스러져서 표제, 한역자명(漢譯者名) 및 본문 약 14행을 완전히 잃었고, 본문에서 약 250㎝까지는 같은 간격으로 1∼2행씩 결실되었을 뿐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분리된 상태였으나, 그 이하부터는 상태가 약간씩 좋아져 권말 부분에 이르러서는 완전했다.

종이의 폭은 6.5∼6.7㎝, 상하 단변(單邊)의 길이 5.3∼5.5㎝에 각 행의 글자 수는 7∼9자로 되어 있고, 경문은 매 폭마다 55행 내지 63행으로 되어 있다. 권축(卷軸)의 폭이 52㎝ 가량 되는 닥종이 12장을 이어 붙여 전체 길이는 620㎝ 가량이며, 직경이 약 4㎝인 권자본(卷子本 ; 두루말이) 형태를 띄고 있다.

경문(經文)의 인쇄는 판각의 글씨가 고르지 않은 것이 많이 보이며, 글자의 획이 생략된 것도 간혹 있어서 초기 인쇄술의 미숙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글씨체는 필력이 곧고 예리하면서도 예스러운 멋을 보여주고 있다.

본 다라니경이 간행된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불국사의 석가탑이 건립된 시기와 경문 중에 섞여 있는 무주제자(武周制字)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불국사는 원래 삼국시대 때 신라 법흥왕(재위 514∼550년)에 의해 창건된 절이지만, 석가탑은 다보탑과 함께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에 의한 대규모의 중수(重修)가 이뤄지면서 세워졌다. 불국사는 그 후에도 여러 번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석가탑을 중수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더욱이 본 경이 들어 있던 사리 장엄구 또한 조형 양식과 특징으로 보아 그 당시에 납탑 공양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 경이 석가탑이 처음 세워질 때 안치된 것이라고 본다면, 적어도 751년의 이전이나 그 당시에 인쇄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음으로 경문에 들어있는 무주제자로 이 경전의 제작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무주제자는 당(唐)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의 집권 재임시(690∼704년)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한자 중에서 1백여 자의 글자를 변조하여 한시적으로 쓰던 글자를 말한다.

이 글자는 너무 복잡하고 불편하여 전체 사용기간이 1백년도 되지 않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되었는데, 석가탑이 건립된 751년에는 중국에서도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었다.

본 다라니경의 전체를 통해 무주제자는 4글자가 10여 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경문이 인쇄된 연대를 추정하는 데에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 글자가 사용된 경전은 당나라 무후(武后) 4년(704)에 번역되었고, 2년 뒤인 성덕왕 5년(706)에는 신라에도 전해졌다.

이 글자가 섞인 본 경이 석가탑에 안치되었다는 것은 석가탑의 건립 당시에 인출된 것이 아니고, 그보다 앞서 신라에 전해진 후 판본으로 유포되게 된 것을 그대로 공양하게 한 것이 아닌 가도 추측된다. 따라서《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제작연대는 본 경이 신라에 전해져 온 성덕왕 5년(706)부터 늦어도 석가탑 건립 년도인 751년 이전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2) 의의와 가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비록 소형의 목판 권자본이긴 하나 다라니 경문의 전부를 완전하게 새겨 글자 면을 상향시켜 먹물을 칠한 다음, 그 위에 종이를 놓고 부드러운 헝겊 뭉치로 문질러서 찍어냈다. 장정(裝訂) 또한 낱장이 아닌 도서의 초기 형태인 권자본으로 되어 있고 판각술도 매우 정교하며 글자체도 필력이 한결 약동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본 경은 목판 인쇄술의 성격과 특징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인쇄물 중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인쇄 연대를 확실하게 밝혀주는 간기(刊記)가 없고, 당시만 해도 신라가 문화의 전반을 중국에서 배우는 입장이었다는 이유에서 본 경이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이라는 설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일부 있어 왔었다.

그럼에도 국내는 물론 외국 학자들까지 이 경전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일 것이라고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욱이 이 경전이 당나라에서 인쇄되어 전해온 것이라는 중국 등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지질(紙質)이나 글자체의 모양으로 미루어 볼 때 당나라의 수입품이 아니고 신라에서 직접 조판(雕板)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특히, 최근 국내 학자들에 의해 연구된 바에 따르면 704년경에 제작된 신라시대의 석비에 음각되어 있는 글씨의 필체가《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같은 사람의 필체로 판명되어 본 경이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확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작 시기 또한 석비 제작과 같은 시대로 추정되고 있어 이제까지 주장되어 왔던 751년경보다 훨씬 앞당겨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목판 인쇄술을 중국으로부터 도입했지만 이를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발전된 문화 수준을 입증하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3) 외국 목판 인쇄물과의 비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는 일본에서 간행된《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이나 최초의 간본(刊本)으로 공인 받고 있는 중국의《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백만탑다라니경》은 일본 여왕이었던 칭덕(稱德)천황이 난(亂)을 평정했을 때 불은(佛恩)에 감사하고 살생의 소멸을 염원하는 뜻에서 764년에서 770년까지 6년간에 걸쳐 1백만 개의 작은 목제탑을 만들고 그 안에 인쇄된 다라니경을 봉안하여 각 사찰에 반사(頒賜)한 경전이다. 이는 일본의 정사와 사찰의 기록이 일치하고 인쇄물도 현존하고 있지만 간기가 없는 탓에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로는 국제적인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다.

폭은 4.5㎝, 길이는 가장 긴 49㎝부터 짧은 것은 15㎝ 정도까지 모양은 다양하며, 1행에는 5자씩이 인쇄되어 있다. 본 경은 모두 같은 것이 아니고 근본(根本), 상윤(相輪), 자심인(自心印), 육도(六度)의 4종으로 되어 있으나, 다시 장단(長短) 2종씩 도합 8종류로 나뉘어 1종당 12만5천 매씩 총 1백만 매를 박았다고 한다.

종이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종이를 사용했는데, 하나는 두꺼운 모직물이고 다른 하나는 얇고 질기며 표면이 매끄러워서 먹이 잘 흡수되지 않고 있는데, 두 종류 모두 매우 오래되어 갈색으로 변해 있다.

《백만탑다라니경》은 나무판 조각에 새겨 먹물을 칠한 다음 도장 찍듯이 날인식(捺印式)으로 찍어낸 인쇄물이다. 본문의 내용 또한 불경에서 짤막한 다라니만을 뽑아서 한 장의 종이에 찍어 낸 조그마한 지편(紙片)의 낱장 인쇄물이다. 따라서, 다라니 경문의 전부를 완전하게 새기고 글자 면에 먹물을 칠한 다음 종이를 문질러서 찍어내고, 낱장이 아닌 권자본으로 되어 있는《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중국에서 간행된 목판 인쇄물 중 현재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실물로는 돈황 석굴에서 발견되어 현재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금강반야바라밀경》이 있다. 이 경전은 7매의 종이를 붙여 두루말이와 같이 한 장으로 되어 있지만, 권자본과 제본한 책자 형태 사이의 과도기 단계인 접자 형태로 되어 있다.

앞에는 석가모니가 설법하고 있는 삽화가 그려져 있고 이어서 경전이 인쇄되어 있는데, 각 행의 글자 수는 17∼19자이다. 인쇄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하며 삽화로 그려진 석가여래 설법도 또한 매우 섬세하다. 그리고, 말미에는 "함통(咸通) 9년(868) 4월 15일 왕개(王 )가 양친을 위해 삼가 만들어 보시함"이라는 간기가 인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경전은 세계 최초의 간기가 있는 인쇄본일 뿐만 아니라 삽화가 있는 최초의 인쇄본이기도 한데, 정확한 간기가 적혀 있는 탓에 현재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로 국제적인 공인을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인쇄본은 글자체나 형태 등이 너무나 정교해서 이 정도 수준의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인쇄기술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더욱이 판식과 판면, 판각술 등의 여러 특징이 송나라 때 간행된 경전들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발전되어 있고, 경전의 간행 동기가 납탑공양의 단계를 완전히 벗어나 개인이 사사로이 양친을 위해 인쇄했다는 점에서, 이는《무구정광대다라니경》보다 훨씬 후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이를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로 인정하기에는 무리가 뒤따른다고 하겠다.

(2) 대장경판의 개판설

목판 인쇄술이 불경 제작에 사용되었던 신라시대 때, 이러한 판각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대장경판까지 개판(開板)하였다는 기록은 문헌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가야산해인사사적(伽倻山海印寺寺跡)》에 "왕후의 발배(發背)의 환(患)이 석덕이승(碩德異僧)의 기적으로 차효(差效)를 보게 되었다 하여 애장왕 3년(802)에 해인사를 창립하였다"고 하였으며, 《해인사유진팔만대장경개간인유(海印寺留鎭八萬大藏經開刊因由)》의 조(條)에는 "합천인 이거인(李居仁)이 정묘 춘삼월에 신라 공주 자매의 시역(時疫)을 퇴치하기 위하여 장경(藏經)의 각판을 발원하였는데, 왕도 재(財)를 사(捨)하고 내외의 조각공을 모아 거제도에서 판목을 만들어 가야산 해인사에 운반하였다"라고 적혀 있어 신라시대 때 이미 경판이 조조(雕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대장경은 현재 한 편도 전해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개판 연유 또한 그 자체가 하나의 전설과 같이 전해져 왔다. 이에 따라 서유거(徐有渠)는 대장경 조(條)에서 "본 경판이 신라 애장왕 때의 각본이라고 전하나 신빙하기 어렵다"고 하였고, 한치연(韓致淵)의《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본국의 해인사 장경판이 고지(古誌)에 신라 애장왕 정묘(丁卯)에 조조된 것이라 하나 애장왕 재위 19년 중에는 정묘의 연호가 없으니 와전된 것"이라고 하여, 이를 대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종래의 학자들은 한결같이 본 대장경의 간행설을 부인하는데 반해, 근래의 연구자들은 이를 마냥 터무니없는 전설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해인사가 창건된 애장왕 3년(802)보다 52년이나 앞선 경덕왕 10년(751)에 세운 불국사 석가탑에서도 목판 인쇄본인《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고, 그 뒤 20여 년이 지난 770년에는 일본에서도《백만탑다라니경》이 인쇄되었으며, 애장왕 3년 무렵 당에서는 이미《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개원잡보(開元雜報)》등을 비롯한 불경이나 문집, 자서(字書) 등의 간본이 상당히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따라서, 현재 해인사에 수장된 대장경 판들이 비록 애장왕 때의 것과는 무관하다 할지라도, 해인사를 창건할 때 공주 자매의 질병을 퇴치하기 위하여 장경의 판각을 발원(發願)했다는 설까지 완전히 부인해 버리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더욱이 고려시대의 방대하고 거창한 대장경의 각성(刻成)도 그 전까지의 기술 축적과 발전 배경이 없이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과《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어 신라의 목판 인쇄술이 입증된 사실 등을 감안한다면, 옛 문헌에 전해 온 경판설을 문헌적으로 고증할 자료가 없다 하여 와전(訛傳)이라고 속단해 버리기보다는, 이 설에 대한 연구가 보다 보완되어야 하리라 본다.

(3) 목판 인쇄술의 발전

통일신라의 말엽에 이르러서는 목판 인쇄술이 더욱 발전하여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읊은 시문(詩文)을 모아 인쇄물로 편찬해 내기까지 했다.

경주 부근의 숭복사(崇福寺)는 신라 경문왕 원년(861)에 건립된 것인데, 여기에 있는 비석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파견된 사신 호귀후(胡歸厚)의 귀국 보고를 듣고 돌아온 최치원이 헌강왕 11년(885)에 왕명을 받아 지었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문 중에 적힌 귀국 보고서에는 신라의 계림(鷄林)에는 아름다운 산수가 많으며, 그러한 경치를 읊은 시에서 잘된 것을 가려 동왕(東王), 즉 신라 임금이 인쇄를 하여 증여해 주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일찍이 운어(韻語)를 철(綴)하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신라인과 주작(酒酌) 하였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해외의 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라고 전재하고 이후에는 산서(山西) 지방 출신들은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는 것이 적합치 않다고까지 보고하고 있다.

이 구절은 너무 간략하므로 어떤 시를 어떻게 인출하였는지 판단하기 어려우나, 여기의 계림은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의미하며 동왕은 신라의 헌강왕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당시 신라인들이 계림의 아름다운 산수를 노래한 시를 인쇄하여 당나라에서 온 사신에게 선물로 증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왕이 사절에게 내리는 예물로서 시문에 능한 신라인들의 시를 특별히 인쇄하여 증여한 것이었겠지만, 이로 말미암아 9세기 후반기인 신라 말기에는 인쇄술이 상당히 보급되어 불경은 물론 시문 등의 일반 서적까지도 판각하기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4) 서책의 도입

삼국시대 때부터 중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자 대륙의 서책들이 불서(佛書), 유서(儒書), 의방서(醫方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많이 도입되었다.

고구려는 국가를 수립한 초기 때부터 한자와 서적들을 들여와 사용하다가 소수림왕 2년에는 태학(太學)을 세워 고관의 자제들을 교육시켰고, 백제 또한 중국으로부터 많은 서책들을 도입하여 사용하다가 근초고왕 때는 아직기와 왕인을 일본에 보내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기도 했다.

또한, 불교가 전래되어 오면서 불경도 함께 도입되었고, 불교가 번창하여 중국으로 유학하는 승려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도입된 서책의 종류와 양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서책들은 사본(寫本)으로 전해 온 것인지 인본(印本)으로 수입된 것인지 추단(推斷)하기는 어려우나, 삼국시대 중·말기 경까지 전해져 온 서책들은 거의가 인본이 아닌 사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는 중국의 동진 및 남·북조 시대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중국에서도 목판 인쇄술이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들어 와서는 중국의 수와 당으로부터 서책 수입이 더욱 활발해져 종교와 관련된 유·불·도교의 서책 뿐만 아니라 천문·법령·의학 등의 전문 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도입되었다.

이 또한 초기에는 인본이라기보다는 거의 사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중국에서 목판 인쇄술이 완성된 7세기 말 혹은 8세기초에 이르러서야 인본도 함께 전해져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도입된 중국의 인본들은 신라에 영향을 주어 8세기초에《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제작을 가능하게 했으며, 9세기 말경에는 당의 사절에게 증여한 시문의 인본들을 제작하게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신라 시대 때 제작된 인본들은 당시 활발했던 당나라와의 교류 관계로 미루어 보아 당의 인본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추정해 볼 수 있지만, 현재 이를 문헌적으로 단정할만한 증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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